미 제재 대상 이란·베네수엘라 '석유-금' 거래
베네수엘라 "이란 유조선 막으면 전쟁행위 간주" 경고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휘발유를 실은 이란 유조선이 베네수엘라에 근접하면서 미국과 이란의 긴장이 첨예해졌다.
23일 선박 추적 사이트의 정보와 인공위성 촬영 자료를 종합하면 이란 남부 항구에서 베네수엘라를 향해 떠난 이란 유조선 포춘호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카리브해에 근접했다.
23일 정오(UTC기준. 한국시각 23일 오후 9시)께 포춘호의 위치는 베네수엘라에서 약 600㎞ 떨어진 지점이다.
이 속도라면 포춘호는 베네수엘라 현지 시각으로 23일 안으로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진입하고 이르면 24일에는 카르카스 항구에 입항하게 된다.
포춘호에 뒤이어 포레스트호, 페투니아호, 팩슨호, 크래블호 등 이란발 베네수엘라행 유조선 4척이 휘발유와 같은 연료를 싣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다.
이란은 자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는 베네수엘라가 극심한 연료난을 겪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조선 5척에 휘발유 150만 배럴을 실어 보냈다.
베네수엘라는 원유 확인매장량이 세계 최대지만 미국의 제재로 정유 시설이 오래되고 유지·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정유 시설의 10% 정도만 가동중이다.
이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수요가 줄어들어 남은 휘발유를 '반미 동지' 베네수엘라에 보내고, 미국의 제재로 부족해진 금이나 유로화를 수출대금으로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달러화를 사용하지 않는 물물교환 방식의 이른바 '금-상품' 현물 거래는 이란, 베네수엘라와 같은 미국의 제재 대상 국가가 제재를 우회해 교역하는 방법이다.
미국과 이란 언론에서는 미 해군이 베네수엘라로 향하는 이란 유조선의 항행을 감시하기 위해 함정과 해상 초계기 등을 카리브해에 배치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이들 베네수엘라행 이란 유조선에 대한 군사작전 가능성은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조너선 호프만 미 국방부 대변인은 21일 "미국은 국제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란과 베네수엘라가 석유제품 거래와 관련해 양국에 부과된 국제사회의 제재를 명백히 어긴다는 사실을 누누이 말했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베네수엘라 국방장관은 20일 "유조선이 우리의 EEZ에 들어오면 환영과 감사의 의미로 군 선박과 비행기가 호위할 것"이라고 밝혔다.
베네수엘라 방송 텔레수르는 23일 오후 7시(한국시각 24일 오전 8시)께 포춘호가 베네수엘라 영해로 진입하면 베네수엘라 군의 전투기와 프리깃함이 출동해 호위한다고 보도했다.
사뮤엘 몬카다 유엔 주재 베네수엘라 대사도 21일 "이란 유조선을 차단하려는 어떤 기도도 '전쟁 행위'로 간주하겠다"라고 경고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도 23일 "미국이 카리브해를 비롯해 지구상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 유조선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그들에게 똑같은 문제가 생기도록 하겠다"라며 "국익 추구는 우리의 합법적 권한으로, 미국이 실수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미군이 군사력을 동원해 이란 유조선을 억류한다면 이는 카리브해의 충돌로 그치지 않고 이란의 '앞바다'인 걸프 해역까지 번질 수 있다.
지난해 6월 4일 영국 해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는 이란 유조선이 유럽연합(EU)의 제재 대상인 시리아로 휘발유를 운반한다는 이유로 나포했다.
이에 이란군은 7월 20일 걸프 해역의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영국 유조선을 억류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이란이 미국과 충돌 위험을 감수하고 베네수엘라로 유조선을 보낸 것은 미국의 '한계선'을 시험해보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일각에서 나온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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