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수무책으로 당한 뉴욕 명품매장 곳곳 가림막 작업 분주
인종 가릴 것 없이 평화시위 목소리…심야 돌변 두려워
(뉴욕=연합뉴스) 이준서 특파원 = 1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뉴욕의 패션 메카 소호(SOHO) 지역엔 간밤 무법천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전날 어둠이 짙게 깔리자, 명품 브랜드 매장은 인종차별 항의 시위대의 표적이 됐다.
구찌, 샤넬, 루이뷔통, 코치…예외 없이 속수무책이었다. 유리창은 박살 났고 진열대는 무참하게 털렸다.
점포마다 두어명의 인부들이 도로변에 널브러진 유리 부스러기를 치우고 나무판자로 매장을 둘러싸느라 분주했다. 곳곳에 배치된 뉴욕경찰(NYPD)들은 폴리스라인 주변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인부들의 작업을 지켜봤다.
한 60대 여성은 "소호에서만 50년 넘게 살았는데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라고 말하면서 인부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가림막 작업은 소호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브로드웨이 대로를 따라 워싱턴스퀘어, 유니온스퀘어, 타임스스퀘어까지 크고 작은 매장마다 두꺼운 나무판자가 등장했다.
지난달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숨진 조지 플로이드(46)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가 폭력적으로 흐르는 징후가 고개를 들자, 본격적으로 대비에 나선 것이다.
경찰의 대응도 자못 강경했다. 브루클린 프로스펙트 공원 인근에서는 뉴욕 경찰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두 대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는 영상이 소셜미디어에 퍼지면서 논란이 됐다.
한 시민은 "폭력 시위로 이끄는 것은 경찰"이라고 비판했다.
선후 관계를 떠나 심야 시위대와 강경한 경찰의 충돌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했고, 상인들의 표정에선 긴장감이 읽혔다.
상점 주인들로서는 두 달 반 동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매장 문을 닫은 상황에서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셧다운'을 이어가게 된 꼴이다.
오후 3시께 소호에서 도보로 1시간가량 떨어진 타임스스퀘어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42번가와 맞닿은 '원 타임스스퀘어' 빌딩 앞 광장에서는 10명 남짓 20대 흑인들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이들은 차례로 돌아가면서 준비한 메시지를 읽어내려갔다. "숨을 쉴 수 없다"는 플로이드의 마지막 호소를 되풀이하는 대목에선 감정에 북받친 듯 고개를 떨궜다.
순식간에 100여명이 주변을 감쌌다. 백인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제각각 종이박스 조각이나 두꺼운 도화지에 구호를 적은 손팻말을 들고 섰다.
'정의 없이 평화 없다', '인종주의 경찰 없어져야', '침묵은 폭력이다',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다양한 구호가 이어졌다. 누군가 "그의 이름은?"이라고 큰 목소리로 선창하자, "조지 플로이드!"라는 한목소리 외침이 돌아왔다.
컬럼비아대학 재학생이라는 히스패닉계 빅토리아는 "백인, 흑인 인종을 떠나 모든 젊은이가 일어난 것이고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만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어제 시위에도 참석했는데 심야의 폭력적인 상황은 언론 보도를 보고서야 알았다. 90% 아니 99%는 평화로운 시위"라며 "타임스스퀘어 집회가 끝나면 유니온스퀘어로 행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소한 뉴욕에서는, 심야 폭력 시위의 모습은 극히 일부 현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뉴욕 퀸스에서 열린 시위에서는 경찰관들이 시위대와 함께 한쪽 무릎을 꿇고 연대의 뜻을 드러내고, 브루클린의 흑인 시위자들은 대형유통점 '타깃'의 정문 앞을 가로막아 약탈을 막아내는 영상이 종일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각, 유니온스퀘어 한쪽에서는 40~50명의 젊은이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이어갔다.
조지 플로이드를 비롯해 억울하게 숨진 흑인 피해자들의 추모 사진들과 조화들이 놓였다.
한 백인 청년은 '백인의 침묵은 폭력'이라고 적힌 피켓을 머리 높이 들어 올렸다.
타임스스퀘어와 유니온스퀘어를 시작으로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와 이스트빌리지, 브루클린의 풀턴스트리트, 베이리지, 맥캐런파크 등지에서 '평화 시위'가 열린다.
시위자들 사이에서는 어둠이 짙어진 이후에도 절제된 시위가 이어질지에는 불안한 표정이 묻어난다. 일부의 폭력 탓에 항의시위 자체의 본질이 흐려지고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불안감을 반영한 듯, 뉴욕시는 이날 밤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야간 통금에 들어갔다.
j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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