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장면 여기저기…아날로그 행정엔 국민적 울화통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1. 도쿄 도심 긴자(銀座) 인근의 쇼와(昭和)대로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루라기를 입에 문 젊은 여경이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단속 근무를 하던 여경은 신호를 어기고 달아나는 승용차를 쫓고 있었다.
자전거(아날로그 환경) 탄 여경이 승용차(디지털 환경) 운전자를 따라잡아 범칙금 통지서를 쥐여주는 데 성공했을까?
#2. 도쿄의 한 병원에서 접수대 뒤쪽을 답답하게 둘러싼 서류꽂이가 눈에 띄었다.
도서관 서가를 연상케 하는 서류꽂이를 빼곡히 채운 것은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 있어야 마땅할 진료 카드였다.
컴퓨터에 기본정보를 저장하고 백업용 카드를 비치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환자 정보를 오롯이 종이에 담아 보관하는 방식은 요즘 시대에 걸맞다고 보기는 힘든 장면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주요 7개국(G7) 멤버라고 자부하는 일본의 일상 속에는 이처럼 의외로 G7 국가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비치는 장면들이 적지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정부 행정체계를 중심으로 그런 모습들이 하나둘 돌출하면서 일본을 과연 디지털 사회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보화 시대를 상징하는 용어인 디지털이 주는 느낌은 속도감이다.
그 반면에 디지털의 상대 개념인 아날로그는 정체되고 느리다는 인상을 준다.
서로 대비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어느 것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로 접근할 사안은 아니다.
두 요소의 병존을 통해 사회가 유기적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코로나19가 정치와 행정의 영역에서 들춰낸 수많은 아날로그적 요소들을 접하면서 자괴감마저 느끼는 듯하다.
한 사례를 보자.
일본인들은 지난달 도쿄 지역의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던 시기에 확진자 집계가 엉터리로 이뤄졌다는 뉴스를 접하게 됐다.
그런데 엉터리 집계 행정의 빌미가 된 것이 아날로그형 통신기기로 볼 수 있는 팩시밀리(팩스)였다는 후속 보도가 나오면서 충격을 받았다.
도쿄도(都)는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이후 복지보건국에 설치된 수신 전용 팩스 1대로 관내 31곳의 보건소로부터 확진자 정보를 받아 취합해 매일 공표했다.
이 과정에서 손으로 종이에 적어 보내는 보고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의료기관과 확진자를 관할하는 보건소로부터 중복으로 보고받는 사례가 더해져 100건이 넘는 착오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 지사의 불호령이 떨어진 뒤에야 부랴부랴 시정돼 온라인으로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체계로 바뀌었다.
도장(한코)과 서면 중심 문화도 코로나19가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일본 사회의 후진적 모습으로 거론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관리자들이 하는 일의 큰 몫이 오프라인 문서에 도장 찍는 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장 사용이 전자결재 문화를 압도하고 있다.
부동산 임대차 계약을 할 때도 관청에 등록된 인감도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고, 식당에서 밥 먹고 영수증을 달라고 하면 반드시 인주를 묻힌 도장을 찍어 준다.
지난 4월 중순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서 중소기업의 60% 이상이 재택근무를 시행하지 않는다고 답했는데, 주된 이유로 꼽힌 것이 서류 정리와 날인 업무 등이었다.
대기업을 회원사로 둔 경제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의 나카니시 히로아키(中西宏明) 회장은 도장에 의존하는 업무 관행에 대해 "난센스"라며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4일 현재 일본의 코로나19 확진자는 1만7천여명, 사망자는 900여명이다.
인구(1억2천600만명) 대비 감염자와 사망자 수만 놓고 보면 일본의 코로나19 대응은 다른 주요 국가와 비교해 별 손색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더욱이 일본은 강제성이 배제된 자숙 요청만으로 감염의 폭발적 확산을 억제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런데도 '일본 모델'이라는 호평은 들을 수가 없다.
이런 현실은 철저한 검사와 감염자의 추적·격리 정책을 편 한국을 놓고는 '한국 모델', 정보기술(IT)을 잘 활용한 대만을 두고는 '대만 모델'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과 대비된다고 일본 언론은 지적한다.
일본 내에서는 오히려 뒷북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증폭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 배경에는 결정된 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하지 못하는 아날로그 행정 체계가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천 마스크 일괄 배포 등 세금 낭비 논란을 일으킨 일부 사안을 떼어 놓고 본다면 아베 정부가 1, 2차로 나누어 마련한 코로나19 대응 정책은 잘 차려 놓은 잔칫상처럼 푸짐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1차 대책의 핵심으로 꼽히는 전 국민 1인당 10만엔의 재난지원금(특별정액급부금) 지급조차도 오프라인 중심의 일 처리에 발목이 잡혀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있다.
총체적으로 느려터진 '아날로그 행정'이 일본 국민의 참을성을 시험한다는 아우성이 커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국가든, 단체든, 개인이든 위기 상황에서 제 실력이 드러나는 법이다.
지난 2일 일본의 43개 기초지방자치단체가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정보를 잘못 입력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업무 부담이 폭증해 재난지원금 온라인 신청 접수를 중단하고 오프라인(우편) 신청만 받겠다는 보도가 나온 뒤 인터넷 공간에는 IT 활용에서 뒤처진 것에 대해 자성하고 비판하는 글이 폭주했다.
그중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IT 담당 대신(과학기술담당상)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이것은 정부 시스템에 구멍투성이라는 얘기다. IT 담당 대신은 제대로 일하지 않으려면 월급을 반납하고 낙향하시라."
이 일갈은 주무 장관만을 겨냥했지만 최장기 집권 기록을 쓰고 있는 아베 총리를 염두에 둔 비판으로 들린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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