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미 한인 밀집지에서 울려 퍼진 "숨을 쉴 수 없다" 함성

입력 2020-06-06 10:46   수정 2020-06-08 07:45

[르포] 미 한인 밀집지에서 울려 퍼진 "숨을 쉴 수 없다" 함성
버지니아 센터빌에서 집회 열려…한인들 "우리도 소수" 힘 보태
"코로나19 걱정되나 인종문제 더 중요"…일부 한인상가 문 닫아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미국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가혹행위로 사망한 사건에 항의하는 미국 시위대의 물결이 한인 밀집지역으로도 번졌다.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버지니아주 센터빌의 한 도서관 앞에서는 5일(현지시간) 오후 경찰의 과잉진압에 항의하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버지니아주에 사는 한인은 11만명으로 센터빌에만 1만명 이상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센터빌 인구가 7만5천명임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수로, 버지니아에서는 애넌데일에 이어 한인 거주자가 두 번째로 많다.
이번 시위는 플로이드 사망에 분노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됐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집회 소식이 공지되고 알음알음 지역민들이 현장에 나왔는데, 이렇게 모인 이들은 줄잡아 700~800명 선으로 적지 않았다.
집회를 주도한 흑인 주니어 몬티로는 "한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인 것을 알고 있다"며 "이번 사건은 단지 흑인이 아니라 모든 미국인에게 해당할 수 있고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시위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이 집회에 참여했고, 이들은 플로이드가 마지막 남긴 "숨을 쉴 수 없다"는 말과 전국을 뒤덮은 시위의 구호처럼 된 "손들었으니 쏘지 마"(Hands Up, Don't Shoot)란 말을 외쳤다.



한인들 모습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40년을 거주했다는 한 50대 여성은 "이렇게라도 해야 작은 변화라도 생길 것 같아 난생처음 이런 집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10명가량의 한인과 함께 이번 시위에 참여했다.
20대 한인 제인스 안도 학창 시절 흑인들과 힙합이나 농구를 하며 많이 어울렸다며 이번 사건에 분노해 직접 피켓을 만들고 차로 20분을 달려 현장을 찾았다고 소개했다.
22살의 김주환씨는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한다면서 극단적 변화는 아닐지라도 정책적 변화가 필요하고 지역 공동체도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해 시위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필립이라고 소개한 다른 한인도 "흑인뿐만 아니라 아시아계도 미국에서 소수다. 우리도 비슷한 일을 당할 수 있는 만큼 모두 힘을 뭉쳐야 한다"고 말했다.
집회 준비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인 대학생은 "한인이 미국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 경향이 있어 마음이 아팠다"며 "미국은 이제 우리 집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반영하듯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찾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백인인 네이선 에번스는 "코로나19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 의사를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고, 김주환 씨도 "코로나19가 퍼지는 게 문제지만 이번 일은 더 큰 문제"라고 힘줘 말했다.
한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적지 않은 쇼핑몰 바로 옆에서 이뤄진 시위다 보니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국의 롯데마트를 포함해 주변의 대형마트 2곳은 정상 영업을 했지만 한인이 운영하는 곳을 포함해 일부 식당은 시위를 앞두고 아예 문이 닫혀 있었다.
다만 시위가 약탈, 방화와 같은 폭력으로 번진 일부 다른 주들과 달리 북버지니아의 경우 이번 주에만 3~4차례 집회가 열렸지만 폭력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은정기 버지니아주 한인회장은 "다른 지역과 달리 북버지니아는 평화집회가 계속 열렸다"며 "전국적으로도 폭력시위 양상이 많이 완화해 상인들 역시 아주 많이 불안해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집회 주최 측도 센터빌 외부 인사들은 시위에 참여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며 평화집회 개최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일부 참여자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려해 여분을 챙겨왔고, 피자나 스낵, 음료수를 무료로 나눠주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다.
질서 유지를 위해 시위 현장에 나온 경찰은 불과 2명이었다. 한 경찰관은 "폭력 시위가 아니다. 2명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시위대는 30분가량 집회를 마친 뒤 인근 사거리로 이동해 보도를 가득 채운 채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차량은 경적을 크게 울리며 호응했다.


jbryo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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