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코로나 공포·더위도 삼킨 분노, 주말 백악관앞 꽉 채웠다

입력 2020-06-07 08:14  

[르포] 코로나 공포·더위도 삼킨 분노, 주말 백악관앞 꽉 채웠다
시위대 최대 규모…구호 외치고 춤 추고 행진하며 자유롭게 분노·연대 의지 표출
의료진 시위 동참에 환호성·감사…트럼프는 골프 자제하고 백악관서 조용한 하루


(워싱턴=연합뉴스) 백나리 특파원 = "코로나로 죽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인종차별도 사람을 죽이잖아요. 그래서 마스크 쓰고 나왔습니다."
토요일인 6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백악관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워싱턴DC의 16번가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시위대로 가득 찼다.
전날 워싱턴DC 당국이 16번가 4차선 도로를 꽉 채워 노란색 페인트로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고 새겨뒀지만 인파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낮 기온이 30도를 넘어가고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질 만큼 습도도 높아 땀이 저절로 흘러내렸지만 다들 크게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손수 만들어온 피켓을 치켜들었다.
인파의 운집을 예상한 듯 상당수가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무더위에 숨쉬기가 불편했으나 벗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우려하면서도 더는 인종차별로 인한 희생이 없도록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워싱턴DC 시민의 양심이 느껴졌다.

코로나19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고 이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분노였지만 시위는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한쪽에서는 구호를 외쳤다.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사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마지막 외침 '숨을 쉴 수가 없다'를 누군가 선창하면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우리도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호응했다.
어디선가 1990년대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었던 댄스곡 '마카레나'가 흘러나오자 주변의 시위대가 음악에 맞춰 다같이 춤을 췄다. 플로이드의 사망은 비극이지만 서로 얼굴도 몰랐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춤을 추는 광경은 이런 비극의 반복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졌다.
또 다른 쪽에서는 행진을 시작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정의', '침묵은 살인' 같은 구호를 외치며 몇몇이 행진에 나서자 주변에서 자유롭게 동참해 함께 구호를 외쳤다.
말 그대로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흥에 겨운 축제는 아니었지만 각자가 좋은 방식에 맞춰 비극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변화의 갈망을 내보이며 플로이드를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갑자기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영웅!"이라는 외침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의료진이 저마다 피켓을 들고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의료용 가운을 입은 이들이 '인종차별은 공중보건 위기', '인종차별은 사람을 죽인다' 같은 종이 피켓을 들고 걸음을 내딛자 시위대가 갈라져 길을 내줬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밤낮을 잊고 고생한 의료진은 시위 동참을 위해 휴무를 반납하고 시위대는 환호와 박수로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모습이 뭉클함을 선사했다.
의료용 가운을 입고 행진하던 백인 여성 켈리는 토요일에 쉬기도 바쁜데 시위에 동참하느라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웃으며 "흑인 목숨은 소중하니까!"라고 말한 뒤 일행을 뒤따라갔다.

시위대에는 20∼30대로 보이는 이들이 많았지만 인종과 성별, 연령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이 참여했다. 특히 자녀를 데리고 온 이들이 적잖게 눈에 띄었다.
딸과 함께 시위에 나온 흑인 여성은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거다. 경찰의 폭력은 멈춰야 한다. 우리는 변화를 원하고 (이를 위한) 정책을 원한다"고 말했다.
엄마 곁의 15세 딸도 "흑인은 너무 오래 억압당했다. 우리는 지쳤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동등함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했다.

시위대로 빼곡한 거리를 2.5m 철조망이 갈랐다. 라파예트 공원 앞까지 나와 쳐진 철조망 뒤로 성조기가 펄럭이는 백악관의 정면이 보였다.
골프광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국면에서 한동안 골프를 자제하다가 현충일 연휴였던 지난달 23일과 24일 이틀 연속 골프장을 찾았다. 그러나 백악관 앞 시위가 이어진 이날과 지난 주말엔 비판 여론이 부담스러웠는지 골프를 치지 않았다.
워싱턴DC엔 지난주 초 오후 7시부터 통금령이 내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군 동원' 엄포에 따라 인근에 실제로 병력이 집결해 긴장이 한껏 고조됐지만 평화시위가 계속되면서 당국의 경계도 이제는 확연히 느슨한 느낌이었다.
시위대 집결지 주변 도로를 장갑차로 막은 건 여전했지만 군복을 입은 몇몇이 장갑차에 걸터앉아 담소했고 곳곳에 배치된 경찰도 시위에 관여하지 않았다. 지난주 초 방위군이 깔려 위압적인 느낌을 주던 워싱턴DC 링컨기념관도 시위대로 가득했을 뿐 더는 삼엄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날 시위는 워싱턴DC에서 이어진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중 참여규모가 가장 크다고 미 언론은 보도했다. 워싱턴DC에서는 지난주 중반 이후부터는 시위 격화로 인한 체포 없이 평화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nar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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