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년] '백병전' 터키군인 "눈앞 죽어간 젊은 한국군 못 잊어"

입력 2020-06-23 07:05  

[6·25전쟁 70년] '백병전' 터키군인 "눈앞 죽어간 젊은 한국군 못 잊어"
제1 터키여단 소속 에르크멘 중사…군우리·금양장리 전투 참전
백병전서 중국군에 대승해 복수…"좋은 양국관계 계속 유지되길"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중국군과 맞설 때 일이에요. 한 15m를 전진해야 하는데 총알이 비 오듯이 날아왔습니다. 재빨리 달려가서 얼른 구덩이에 엎드렸죠. 뒤에 있던 한국군 젊은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젊은이는 내가 있는 구덩이로 몸을 날리다가 총알에 맞아 쓰러졌어요."
터키의 6·25전쟁 참전용사인 아지즈 에르크멘(92) 씨는 지금도 눈앞에서 죽어간 한국군 젊은이를 잊지 못한다. 벌써 70년 전 일이지만 이름 모를 젊은이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돈다.
"팔을 뻗어 쓰러진 한국군 젊은이를 구덩이로 당기려고 했어요. 하지만 너무 무거웠죠. 구덩이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어요. 결국 그 청년은 몇 번 더 총에 맞고 숨을 거뒀어요. '아이고 아이고' 하던 그 청년의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22일(현지시간) 92세의 에르크멘 씨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애초 지난 8일 주이스탄불 총영사관이 마련한 6·25 참전용사 마스크 전달식에서 그를 만날 예정이었으나, 터키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취약한 65세 이상 노년층의 외출을 금지하면서 전화로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터키는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5천명 규모의 여단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에르크멘 씨는 제1 터키여단 소속으로 1950년 10월 17일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계급은 중사였다.
에르크멘 중사는 참전 터키 여단의 대표적인 전투인 군우리 전투와 금양장리(김량장리) 전투에 모두 참여했다.
1950년 11월 27일 터키군은 평안남도 군우리에서 북한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국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전투는 1919년 독립전쟁 이후 터키군이 겪은 첫 실전이었다.
"군우리 때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한국군도 우리와 같이 있었어요. 힘겹게 포위를 뚫었지만 여러 명이 전사했죠. 전우들이 바로 옆에서 죽어갔습니다."
터키 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병력이 5배에 달하는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767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피해를 봤다. 그러나 터키 여단이 중국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사이 미국 2사단 등 유엔군 주력부대는 포위를 뚫고 남하해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두 달 뒤 터키 여단은 경기도 용인읍 김량장리에서 다시 중국군과 맞붙었다. 터키 여단은 군우리의 복수를 다짐하며 중국군이 지키던 151고지를 향해 돌격, 대승을 거뒀다.
"김량장리 전투에서 중국 부대를 전멸시켰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가 김량장리에서 중국군을 무찌른 것을 보고 미군이 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 같습니다."
백병전을 무릅쓴 터키 여단의 공격에 중국군은 1천900여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터키군 사상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이후 터키 여단은 '백병전의 터키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에르크멘 씨는 전쟁 당시 한국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재와 먼지로 가득한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길가에는 다치고 병든 사람이 넘쳐났고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 헤매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 감정은 전쟁을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어요."
그는 2012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61년 만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몰라볼 정도로 발전한 한국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전쟁 때 한강 위에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기차가 지나가기 위한 것이었죠. 이제는 한강에 다리가 32개 있다고 하더군요. 또 한국에서 전 세계 선박의 40%를 생산한다고 들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한국이 이길 때마다 터키가 이긴 것처럼 기뻤다고 했다.
"아마 모든 터키인이 한국의 승리를 기뻐했을 겁니다. 한국인도 터키의 승리를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에르크멘 씨는 6·25 전쟁 당시 한국에서 쓴 일기를 바탕으로 2011년 '한국전 참전용사의 일기'라는 책을 냈다. 이미 구순을 넘긴 나이지만 한국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다.
"우리 참전용사들은 한국을 아주 사랑합니다. 양국 관계가 지금도 좋지만, 앞으로도 이 관계가 계속 유지되길 참전용사들은 간절히 바랍니다."


kind3@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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