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2018년 3월 8일 오전 2시 50분께, 충남 금산군의 한 저온창고에서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1시간 40분만에 꺼졌지만 저온창고 오른쪽 지붕 일부가 폭발로 날아가고 창고 상부가 심하게 훼손됐으며 내부에 저장된 물품도 거의 다 탔다.
창고 임대업자 A씨에 따르면 창고 안에는 홍삼제조업자 B씨에게 계약금을 지불하고 넘겨받은 잔뿌리 홍삼, 즉 홍삼미 박스 150개가 보관돼 있었다.
불이 나기 약 한달 전 A씨는 홍삼미 600g당 7만7천원에 총 7천200㎏을 사들이는 내용으로 B씨와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 3천300만원을 줬다.
잔금은 석달 후 지불하기로 하고 채무변제계약공증서까지 작성했다.
진화 후 창고 안에는 골판지 박스 조각과 재 등 연소 잔여물만 남았을 뿐 성한 홍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홍삼미와 비슷하게 보이는 식물 뿌리 1개가 타다 남은 채 발견됐다.
계약금만 주고 홍삼을 받았는데 다른 곳에 팔기도 전에 불이 나 9억원이 넘는 물건이 연기로 사라진 것이다. 정확한 화재 원인도 쉽게 규명되지 않았다.
화재 직후만 해도 불의의 사고 피해자로 여겨진 A씨에게 의심의 시선이 쏠리게 된 건 그가 창고 보관 물품에 대해 손해보험사 6곳과 총 16억원에 이르는 화재보험에 든 것으로 드러나면서다.
A씨는 2017년 12월 29일부터 이듬해 1월 11일 사이에 보장 금액이 6천300만∼5억원인 보험 계약을 잇따라 체결했다. 불이 나기 겨우 두달 전이다.
각 보험사 SIU의 조사와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미심쩍은 거래 정황과 사기 가능성을 암시하는 현장 증거가 잇따라 포착됐다.
홍삼 매수자 A씨는 매매 계약 체결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고, B씨는 신용등급이 매우 낮았는데도 둘 사이에 거액의 홍삼 거래 계약이 성사됐다. 매매 가격 총액도 시세보다도 3억4천만원 이상 높은 것으로 파악됐다.
판매자 B씨는 과거에 이 정도로 대규모 홍삼을 제조한 이력이 없었고, 이번 거래량만큼 홍삼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수삼을 매입한 기록도 없었다.
이번 계약에서 B씨는 계약금 3천300만원만 받고 총 9억2천만원이 넘는 홍삼의 관리권을 A씨에게 넘기는가 하면, 대금 지급을 보장할 만한 인적, 물적 담보를 설정받지도 않아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화재 후에도 둘의 행태는 일반적인 관행과 너무나 달랐다. A씨는 주택 담보 대출을 받아 홍삼 대금 잔액 약 9억원 중 1억5천만원을 지급했다고 해명했을 뿐 더는 지급한 잔금이 없다고 진술했다. 판매자 B씨는 대금 청구 절차를 적극적으로 진행하지도 않았다.
화재 현장에서도 이들의 사기 행각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물증들이 나왔다.
진화 후 현장의 연소 잔류물은 홍삼 150박스가 있었다기에는 그 양이 적었다. 타다 남은 박스 조각은 볼 수 있었지만 박스보다 연소성이 약한 홍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홍삼처럼 생긴 식물의 뿌리에서는 홍삼 특유의 테르펜계 화합물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남은 뿌리도 홍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증거는 홍삼이 창고 안에 없었거나 7천200㎏에 현저히 못 미치는 양이 있었다는 추론으로 이어졌다.
SIU의 의뢰로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두 사람이 짜고 홍삼 매매계약을 허위로 체결하고 창고에 불을 낸 후 보험금을 청구한 보험사기로 결론내렸다.
올해 5월 대전지방법원은 A씨와 B씨 모두를 보험사기방지특별법 위반 혐의에 유죄 판결하고, 각각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보험사기가 미수에 그쳤는데도 중형이 내려진 것이다.
재판부는 이들 2인조에 대해 "피고인들은 화재로 소실된 재물 가액을 허위로 기재해 보험금 지급 청구를 했으므로 보험회사들을 속였다고 보기에 충분하다"며 "피고들이 실제로 방화를 했는지 여부는 더 살필 필요가 없다"고 판시했다.
또 "보험사기는 선량한 가입자들에게 손실을 전가하는 행위로 사회적 폐해도 심각해 무거운 처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을 조사한 SIU 관계자는 11일 "재판부는 비록 이들이 보험금을 타지 못했지만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죄질이 무겁다고 봤다"고 전했다.
사기 혐의를 내내 부인한 피고들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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