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사치스럽게 생활…난징학살은 날조"…역사 왜곡까지
재일한국인 여성 5년간 법정투쟁…1심서 일부 승소 판결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의 한 상장기업이 장기간 사내에 배포한 혐한(嫌韓) 문서의 실태가 현지 법원의 판결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 기업에서 일하는 재일 한국인 여성(이하 여성)이 사용자 측의 부당 행위에 맞서 5년 가까이 법정 투쟁을 벌인 끝에 최근 받아낸 일부 승소 판결문(1심)을 연합뉴스가 입수해 12일 살펴보니 배포된 문서의 내용은 혐한 시위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심각했다.
◇ 사원 교육이라며 "한국은 날조 국가" 문서배포
"한국은 영원히 날조하는 국가", "자이니치(在日, 재일한국·조선인을 의미)는 죽어라."
도쿄증권거래소 1부 상장기업인 후지주택이 2013∼2015년 임원 또는 직원들에게 배포한 문서들에 등장하는 표현들이다.
한국에 대한 혐오 감정을 사실상 조장하거나 역사 문제에 관한 일방적인 주장을 담은 글,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대한 반성을 부정하는 듯한 내용이 문서에 대거 포함됐다.
예를 들면 한국인을 "야생동물"에 비유하는 유튜브 댓글이나 "한국의 교활함이나 비열함, 거짓말 행태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포털사이트의 글들이 문서 형태로 배포됐다.
한일 갈등에 관해 "그들의 목적은 배상금인 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그들은 역사를 날조하면서까지 상대가 사죄하게 함으로써 항상 입장의 우위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민족"이라며 한민족을 깎아내리는 내용도 문서에 포함됐다.
또 "우리들은 부모로부터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중국이나 한국은 '속은 쪽이 나쁘다', '거짓말도 100번 말하면 진짜가 된다'고 믿고 있는 국민이다"는 등의 발언이 담긴 인터뷰 기사도 있었다.
후지주택은 "일본과는 반대로 한국·북한은 뇌물을 당연시하는 민족성이 있다. 뇌물을 주고 보답을 받는 것이 전통"이라는 등의 발언을 담은 대담 기사 등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문서를 태연하게 배포했다.
이 업체는 이런 행위가 "경영 이념과 결부된 인격 면에 관한 종업원 교육의 하나"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회사의 한 직원은 업무 예정표에 한국에 관해 "일본은 모든 지원을 끊고 단교하는 것이 좋다"는 감상을 써서 제출했고 회사 측은 이를 문서로 만들어 사내에 돌리기도 했다.
◇ "위안부 사치스럽게 생활…야스쿠니 참배해야" 역사 왜곡
후지주택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관해서는 피해자의 증언이나 국제기구가 인정한 사실을 부정하는 내용을 임직원에게 주입하다시피 했다.
예를 들어 "일본은 강제적으로 위안부를 납치해 그런 직업에 종사하겠다고 비판받고 있지만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돌렸다.
심지어 "위안부들은 통상 독실이 있는 대규모 2층 가옥에서 숙박하고 생활하면서 일을 했다. 그녀들의 생활 모습은 사치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위안부는 접객을 거절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부채의 변제가 끝난 몇 명의 위안부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했다"는 내용을 배포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미군이 조사한 위안부들의 본인 자신의 이유(빈곤 등)에 의해 위안소에 들어와 한 달에 1천∼2천엔(일반 명사의 월급과 비교해도 100배 이상의 고액)을 벌었다"는 설명이 덧붙였다.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조사한 후 공식 발표한 '고노(河野)담화'에도 역행하는 내용이 버젓이 뿌려진 것이다.
후지 주택은 우익 사관도 사실상 옹호했다.
예를 들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훌륭한 국회의원 선생님들은 계속 당당하게 참배하고 국가를 위해 힘을 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런 정치가를 나는 응원한다"고 업무일지에 쓴 사원의 소감이나 "난징(南京)대학살은 역사의 날조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주장이 문서로 공유됐다.
◇ 법원 "현저한 모욕감…넓은 의미의 사상교육"
현지 법원은 후지주택 측의 행위가 여러 측면에서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문서가 "한국 국적이나 민족적 뿌리를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보면 현저하게 모욕을 느끼게 하고 명예 감정을 해치는 것"이라며 "현저한 혐오 감정을 가지고 있는 피고(후지주택 및 후지주택 회장)로부터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할만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또 역사 문제와 관련된 사안에서 특정한 방향의 주장을 담은 문서를 배포한 것에 대해서는 "넓은 의미에서 사상 교육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원고(여성)를 비롯해 여러 사상·신조 및 주의·주장을 지닌 노동자의 사상·신조에 크게 개입할 우려가 있다"며 "위법"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판결은 국적·민족적 뿌리를 이유로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괴롭힘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혐한 문서를 배포한 행위가 내용, 취지, 목적, 방식 등에 비춰볼 때 "여성 개인을 향한 차별적 언동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에 대한 혐오 감정을 부추기는 문서를 사내에 배포한 것이 노동자의 인격적 권리를 침해한 위법행위라고 판정해 제동을 걸기는 했으나 특정 개인에 대한 차별적 행위로는 볼 수 없다고 평가해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오사카지방재판소는 배상금으로 위자료 100만엔(약 1천124만원)과 변호사 비용 10만엔(112만엔)만 인정했다.
후지주택의 2019 회계연도 매출액이 1104억4천400만엔(약 1조2천419억원)에 달하는 점과 여성이 5년 가까이 회사를 상대로 외로운 법정 투쟁을 벌인 점 등을 고려하면 위자료 산정에서 인색했다고 볼 수 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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