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검찰 정당방위에서 살인으로 입장 바꿔
여성 단체 "살기위해 다른 방법 없었다" 반발
2년 조사 마치고 31일부터 재판 시작
(서울=연합뉴스) 홍준석 기자 = 2018년 7월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한 아파트 계단에서 목과 가슴 등에 30여개의 자상을 입고 숨진 미하일 하탸투랸의 시신이 발견됐다.
하탸투랸을 살해한 범인은 세 딸 크레스티나(21)와 안젤리나(20), 마리아(19)였다. 이들은 아버지를 살해한 후 공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자해했고, 경찰과 소방당국에 신고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음 날 체포돼 범행을 자백했으며, 오랫동안 부친으로부터 신체적·성적 학대를 당해오다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범행 당시 미성년자였던 마리아도 만 18세가 된 작년 기소됐다.
CNN 방송 등은 지난 2년간 이들 3자매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31일(현지시간)부터 러시아 법원이 재판을 시작한다고 보도했다.
이번 재판이 관심을 끄는 것은 범죄 혐의를 살인으로 볼지, 정당방위로 봐야할지 의견이 팽팽히 엇갈리기 때문이다.
검찰도 애초 세자매의 존속살해를 정당방위로 인정할 여지가 있었다.
하탸투랸은 사망 당일 정신과에 갔다 온 뒤 세 딸을 줄지어 세워놓고 집이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얼굴에 후추 스프레이를 뿌렸다.
이로 인해 천식을 앓고 있었던 크레스티나는 기절했다.
세자매의 변호인단은 하탸투랸이 2018년 4월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의심하면서 세자매에게 "너희들은 창녀고 창녀처럼 죽게 될 것"이라며 위협했다고 말했다.
또 변호인단은 "하탸투랸이 자녀들을 절망으로 내몰았고 이들은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면서 "이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비교될 수 없다"면서 "(부친을 살해하는 것 외에) 별다른 선택지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시민사회도 세자매를 옹호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인권운동가들은 지난해 여름 "죽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수십차례 집회를 하면서 세자매의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방송인 크세니야 솝차크 등 유명인사도 세자매에게 선처를 베풀어달라며 청원서를 제출했다.
러시아 검찰도 지난 1월 "폭행당하고, 모욕과 위협에 시달리고, 신체적·성적으로 학대당해왔다"면서 세자매의 살인을 정당방위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 5월 별다른 설명 없이 계획 살인 혐의를 확정했다.
미국 CNN 방송은 이러한 검찰의 태도 변화가 러시아 사회의 보수화와 관련 있다고 지적했다.
이달 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헌법 개정을 통해 재집권의 가능성을 열어놨다. 군사 전문기자 출신의 우주 분야 국영기업 고문 이반 사프로노프가 국가반역 혐의로 체포되거나, 세르게이 푸르갈 전 하바롭스크 주지사가 살인 등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2017년에는 러시아 정교회 등의 압박을 받은 러시아 의회가 가정폭력 처벌 수위를 낮추는 일명 '때리기 법'(slapping law)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honk0216@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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