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어때] '덕후'의 열정이 탄생시킨 공간 '4560디자인하우스'

입력 2020-09-30 07:30  

[여기 어때] '덕후'의 열정이 탄생시킨 공간 '4560디자인하우스'
미니멀리즘 선구자 '디터 람스'에 반한 수집가의 컬렉션
브라운 빈티지 제품부터 애플까지…미니멀리즘 디자인을 한 눈에



(서울=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덕후'의 열정은 아무도 못 말린다.
양재동에 둥지를 튼 '4560디자인하우스'는 1950∼1980년대 미니멀리즘 디자인 제품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220평(727㎡) 공간을 빼곡히 채운 수많은 전시품이 평범한 한 개인에 의해 6년간 수집된 소장품이라는 점이 놀랍다.

◇ LESS BUT BETTER
20세기 대량생산과 함께 발전한 산업 디자인은 더 많이 만들어 더 많이 팔기 위한 수단이었다.
기술이 빠른 속도로 변하면서 제품의 수명은 점점 더 짧아졌다. 새로운 제품을 위해 이전 제품은 버려져야 했고, 소비자의 눈을 유혹하는 더 새롭고 더 독창적인 디자인이 넘쳐났다.
독일의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 1932∼)는 이처럼 대량생산과 물질적 풍요에 도취된 시대에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디자이너다.
그는 디자인이 단지 상품 판매를 돕는 상업적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Less, but Better'(가능한 한 더 적게, 그러나 더 낫게)는 이런 믿음으로부터 나온 그의 디자인 철학이자 삶의 철학이다.
본질적인 요소를 압축하고 산만한 요소를 제거해 누구나 설명서 없이도 쉽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과시하지 않는 정직한 디자인, 버려지는 것이 흔한 현대사회에서 질리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디자인…
그가 정립한 '좋은 디자인의 10가지 원칙'은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 '덕후'의 열정이 탄생시킨 공간
양재동에 둥지를 튼 '4560디자인하우스'는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선구자인 디터 람스의 철학이 담긴 디자인 제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디터 람스가 40년간 몸담았던 독일 가전 회사 브라운의 제품을 비롯해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1950∼1980년대 미니멀리즘 디자인 제품들이 220평 규모의 전시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전시 컬렉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질레트에 인수되기 전 브라운의 '리즈 시절' 제품들이다.
TV, 라디오, 턴테이블, 스피커, 계산기, 면도기, 카메라, 믹서기… 일일이 종류를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마치 브라운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제품 하나하나에서 디터 람스 특유의 절제된 디자인을 볼 수 있다.
무엇 하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명료하면서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세련됐다. 수십 년 전 디자인 된 제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더 놀라운 것은 이곳이 한 수집가의 열정으로 탄생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음향기기에 빠져있었던 웹 디자인 회사 대표 박종만 씨는 6년여 년 전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의 턴테이블을 접하면서 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가 디자인한 브라운 빈티지 제품을 찾아 밤잠을 설치며 해외 경매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그렇게 취미로 하나둘 사 모은 제품은 어느새 보관하기 힘들 정도로 불어났다.
사무실 한쪽에 쌓여 있는 제품들을 혼자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60평 사무실 중 40평(132㎡)을 소박한 갤러리로 꾸몄다.
전시 공간이 워낙 좁아 관람 인원을 한 회 20명으로 제한하고 예약을 통해 일주일에 사흘 관람객을 받았다.
자신이 직접 도슨트가 되어 관람객들에게 설명하고 입장료 없이 기부금을 받는 방식으로 운영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한두 달 하려고 끝내려던 전시는 그렇게 2년간 이어지면서 2만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이들의 응원과 격려에 힘입어 지난 7월에는 전시 공간을 220평 규모로 확장 이전해 어엿한 갤러리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 1950∼1980년대 미니멀리즘 감성을 공유하다



전시장은 중앙의 긴 통로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시대별로 구분된 공간을 하나하나 둘러보면 마치 누군가의 집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작품에 이름표를 달아 쭉 늘어놓는 일반적인 전시장과 달리 한 시대의 제품들로 그 시대 가정집의 모습을 재현해 놨기 때문이다.
전시장 초입은 1950∼1960년대 거실을 재현한 공간들이다. TV와 라디오부터 의자와 조명, 카펫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에 디자인된 제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이곳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백설 공주의 관'으로 불리는 라디오 겸용 턴테이블 'SK4'다.
1950년대 나온 이 제품은 브라운의 역사를 새로 쓴 제품이자 오디오 디자인의 역사를 새로 쓴 제품이다.
디터 람스는 육중했던 기존의 오디오 디자인을 버리고 컴팩트한 올인원 시스템으로 제품을 만들었다.
제품 전면에 있던 컨트롤 버튼은 모두 상단으로 옮기고, 투명한 아크릴 소재로 덮개를 만들었다.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디자인이었다.
이 제품이 처음 나왔을 때 장난감 같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경쟁사에서는 아크릴 소재를 비꼬며 '백설 공주의 관'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곳저곳 쉽게 옮길 수 있다는 편리성 덕분에 결국 대박을 터뜨렸고 전 세계 음향기기 디자인의 표준이 됐다.



소형 가전제품들이 진열된 선반 역시 디터 람스가 만든 것이다.
1955년 브라운에 입사한 그는 1961년부터 30여년간 브라운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영국 가구회사 '비초에'의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606 유니버설 셸빙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이 선반은 원하는 만큼 사서 원하는 형태로 조립해 쓸 수 있는 모듈 가구다. 1960년에 디자인된 제품이지만 세월을 뛰어넘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 기술은 변해도 '좋은 디자인'은 남는다



거실을 지나면 서재가 나온다.
'디터 람스'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면 이곳이 그의 서재를 재현한 공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벽에 걸린 오디오와 녹음기(TS45·TG60)부터 비초에의 책상, 바닥의 하얀 타일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등장했던 디터 람스의 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선반 위에는 디터 람스 대표작 중 하나인 TP1과 T4가 조너선 아이브의 아이팟 1세대와 나란히 놓여 있다.
TP1은 7인치 LP를 들고 다니면서 들을 수 있는 휴대용 레코드플레이어 겸 라디오다.
턴테이블의 바늘이 위쪽이 아닌 아래쪽에서 LP와 접촉해 음악이 재생되는 획기적인 디자인의 제품이다. 필요에 따라 소형 포켓 라디오인 T4를 끼웠다 빼냈다 할 수 있는 구조다.
디터 람스는 소니의 워크맨보다 20년 앞선 이 제품을 '최초의 워크맨'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 출시된 포켓 라디오 T4와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뒤 나온 아이팟 1세대는 생김새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아이팟을 디자인 한 애플의 전 수석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 스스로 '디터 람스로부터 영감을 받은 제품'이라고 했다.
나란히 놓인 두 제품이 "기술은 변해도 '좋은 디자인'은 남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isunn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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