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받는 '2인자'…인민일보·신화·CCTV, 총리 재난 시찰 이례적 미보도
시진핑과 경쟁했던 '공청단계' 리커창…노점경제 제창 후 수모당하기도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중국의 공식 권력 서열 2위인 리커창 총리가 최근 수해 지역인 충칭(重慶)시를 찾아가 진흙투성이가 된 고무장화를 신고 현장을 돌아보면서 주민들을 위로했다.
중국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은 리 총리의 사진을 퍼 나르면서 '인민의 훌륭한 총리'라고 환호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 같으면 이런 모습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을 인민일보, 신화통신, 중국중앙(CC)TV를 포함한 핵심 관영매체들이 리 총리의 수해 지역 방문 행보 소식을 일제히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기, 관영 매체들이 안후이성 수해 지역 시찰 중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행보를 연일 열렬히 보도 중인 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당내 권력 투쟁설이 다시 제기되는 모습이다.
◇ 사라진 리커창 보도…권력 이상 징후인가
23일 중국 국무원이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인 정부망(政府網)에는 지난 20일부터 리 총리의 충칭행 소식과 함께 여러 장의 현장 사진이 공개됐다.
리 총리는 바닥에 진흙이 두껍게 쌓인 수몰 지역을 찾아가 주민들을 위로하는 한편 현지 중소기업 관계자들을 만나 이들의 어려움을 직접 청취했다.
하지만 신화사 등 '3대 관영 매체'를 포함한 대부분 관영 매체는 이런 내용을 일절 보도하지 않고 있다.
대만 중앙통신사는 "리커창 총리가 20일 충칭 수해 지역을 방문해 재해 상황을 점검했는데도 인민일보, CCTV, 신화통신이 현재까지 일절 보도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이례적"이라며 "베이다이허 회의 이후 (중국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설이 재점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에서는 최고위급 지도자들에 관한 보도가 사라지거나 지연되는 현상이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차기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당내 권력 투쟁이 치열하던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 주석 시절,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의 동정 보도가 관행보다 하루나 이틀씩 더 늦어지더니 그가 끝내 낙마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만 이번 리 총리의 수해 현장 방문 보도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낙마 가능성을 바로 속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중국의 집단지도체제가 실질적으로 와해하고 권력이 시 주석 1인에게 완전히 쏠린 상황에서 거의 동시에 이뤄진 최고위 지도자들의 수해 현장 방문 보도가 '1인자'인 시 주석 위주로 이뤄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또 정부망이 공개한 사진들을 보면, 리 총리의 이번 충칭시 방문 과정에서 시 주석의 측근이자 유력한 차기 최고 지도자 후보군에 속한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서기가 '정상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 '소외된 총리' 리커창…갈등설에 지속 노출
그럼에도 최근 중화권에서는 시 주석과 리 총리의 '권력 투쟁설', '불화설'이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모습이다. 리 총리의 낙마 같은 극단적 상황을 상정하지는 않더라도 리 총리가 권부 중심에서 소외되는 흐름은 비교적 선명해 보인다는 평가다.
실제로 시 주석 집권기 내내 리 총리는 시 주석에게 권한을 계속 내주면서 주변부로 밀려나는 모습을 보인다.
중국이 현대 집단지도 체제가 자리 잡은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 시절에는 총리가 경제를 중심으로 한 한 내치를 책임지는 자리로 인식됐지만 시 주석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모든 정책 결정 권한이 최고 지도자와 그 측근들에게로 쏠리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6월 리 총리는 코로나19 충격으로 어려움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단속 완화를 통해 노점상을 활성화하자고 주창하고 나서 중국 각 지역에서 지방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노점 바람'이 뜨겁게 일었다.
그러나 중국 관영 매체들이 돌연 노점 활성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노점 경제'는 흐지부지됐고, 이를 주창했던 리 총리는 사실상 공개적인 수모를 당한 꼴이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 기자회견에서 리 총리가 말한 '6억 빈곤설'도 당내 불화설과 맞물려 크게 주목받았다.
당시 리 총리는 폐막식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지적하며 "6억 명의 월수입은 겨우 1천 위안(약 17만원)밖에 안 되며, 1천 위안으로는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고 토로했다.
대외에 공개되지 않던 자국의 '치부'를 드러낸 리 총리의 발언은 시 주석이 선전해온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 건설'에 대한 정면 반박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에서는 1년에 단 한 번 총리가 중국 안팎에 TV로 생방송되는 전인대 폐막 기자회견을 통해 '검열' 없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날 그가 작심하고 이런 발언을 했다는 관측에 힘이 실렸다.
◇ 전문가 "리커창, 시진핑에 반대 힘 없어"
리 총리와 시 주석은 후진타오 시절 차기 1인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툰 라이벌 관계다.
중국 최고 명문인 베이징대 경제학 박사인 리 총리는 중국 공산당 내 주요 파벌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지만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 자제 그룹)계와 장쩌민계인 상하이방이 연합해 밀어준 시 주석에게 1인자 자리를 빼앗기고 2인자인 총리 자리를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중화권 일각에서는 시 주석이 이번 수해 방문 지역을 공청단계의 두 거두인 후진타오 전 주석과 리 총리의 고향인 안후이성으로 선택한 것도 당내 권력 투쟁과 연관 지어 보기도 한다.
홍콩 명보는 지난 19일 "안후이성은 후진타오의 호적지이고 (공청단파인) 리커창과 정협 주석 왕양의 고향"이라며 "올해 베이다이허 회의 기간 중 당내 일부 세력이 '시진핑 타도'를 시도했다는 설이 있는데 리커창도 거기에 거론된 한 명"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 같은 관측이 뚜렷한 근거가 없어 너무 나갔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홍콩 중문대 중국연구센터 객원교수인 린허리(林和立)는 대만 중앙통신사에 "명보에 실린 글은 지극히 선정적인 글"이라며 "리커창은 스스로 시진핑에 반대할 힘이 없음을 알기에 그가 시진핑 타도 세력을 대표한다는 얘기는 신뢰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c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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