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일당 주고 두달간 부려먹은 셈…일본 법원도 "위법" 규정
군함도 역사 왜곡 관변단체 3년간 일본 정부 사업 104억원 수주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징용피해자가 고임금 노동자였다는 식의 역사 왜곡이 확산하는 가운데 일본 측은 징용 피해자의 노역 대가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일본 시민단체가 제시했다.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사무국에서 활동하는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씨는 징용 피해자인 김순길 씨가 제기한 재판에서 드러난 임금 관련 내용을 18일 일본 도쿄도 소재 참의원 의원 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개했다.
김 씨는 1944년 12월 하순 국민징용령에 의해 징용돼 1945년 1월부터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에서 징용공으로 노역하다 같은 해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피폭당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징용 피해자다.
그가 1992년 7월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재판 기록에 의하면 일본 측이 1945년 1·2월분으로 산정한 김씨 급료는 임금, 가급금(加給金) 등 116엔 32전이다.
하지만 건강보험료, 퇴직적립금, 기숙사비, 국민저축 등을 이유로 한 공제금이 86엔 32전에 달했고 이를 제외한 지급액은 30엔에 불과했다.
일제 강점기 역사 전문가인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도쿄대 교수는 만약 징용 피해자가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면 전쟁 말기에 일손 부족이 심각했으므로 "하루 10∼15엔 정도 받았을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단순 계산으로 보면 2∼3일분 일당을 주고 2개월 동안 부려먹은 셈이다.
판결에 의하면 김씨가 3∼6월분 월급을 받았는지는 실태가 파악되지 않았고 7월분은 지급되지도 않았다.
1997년 12월 2일 내려진 일본 법원 판결은 "반 정도는 연금에 가까운 상태에서 노동에 종사시켰다"며 "국민징용령에 토대를 둔 징용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위법적인 것"이라고 판시했다.
하지만 법원은 전쟁 중의 미쓰비시중공업과 전후의 미쓰비시중공업이 별개라는 논리로 결국 김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도노무라 교수는 일본 우파와 관변 단체 등이 최근에 확산시키고 있는 조선인 차별이 없었다는 등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개인적으로는 사이가 좋았다는 증언도 있지만, 일본 사회에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규정했다.
도노무라 교수는 후쿠오카(福岡)현 야하타(八幡)제철소에서 일본인이 화물을 싣는 작업을 하던 조선인 남봉관 씨에게 "왜 힘을 내지 않느냐. 제대로 힘을 써라"고 다그치거나 "너는 조선인 주제에 건방지다. 조심해라"며 무릎을 때렸다는 내용이 전쟁 중 경찰 기록의 일종인 '특고월보'(特高月報)에 남아 있다고 소개했다.
도노무라 교수는 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인과 달리 직장을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만약 달아나는 경우 경찰에 붙잡혀 돌려 보내졌다며 조선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도 소개했다.
그는 군대에 가는 것보다 탄광에서 힘들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로 탄광 노역은 가혹했고 "탄광 등의 업종에는 일본인은 신규 징용되지 않았다"며 조선인을 유독 힘든 곳에 동원한 실태를 지적했다.
역사 왜곡에 앞장서는 관변단체가 일본 정부로부터 거액의 사업을 따낸 것도 확인됐다.
시민단체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가 정보공개 청구로 확보한 자료와 일본 정부가 공개한 조달 정보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는 2017년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3년 4개월 사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약 9억3천571만엔(약 104억원)어치의 사업을 위탁받았다.
국민회의는 조선인 징용 현장인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를 비롯한 세계유산 홍보 시설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운영하며 강제 동원 과정의 인권 침해 등을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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