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비극 되풀이되지 않도록…멕시코시티 도심의 反기념비

입력 2020-09-27 07:07  

[특파원 시선] 비극 되풀이되지 않도록…멕시코시티 도심의 反기념비
교대생 실종·어린이집 화재 등 참사 되새기며 정의 실현 요구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도심의 레포르마 대로는 온갖 조형물로 가득 차 있다.
아스테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콰우테모크와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천사탑 등 멕시코 역사의 주요 순간을 기리는 기념물들을 만날 수 있다.
대로 곳곳엔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조형물들도 있다.
'43' 'ABC' '65' 등 쉽게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와 문자들로 이뤄진 조형물들은 멕시코의 아픔을 간직한 '반(反)기념비'(Anti-monumento)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위대한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정의 실현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데에서 '반'이라는 접두사가 붙었다.
레포르마 대로에서 도심 소칼로 광장 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쯤 빨간 십자가 옆에 숫자 43이 적힌 조형물은 6년 전 사라진 교대생 43명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2014년 9월 26일 밤 게레로주 아요치나파 교육대학의 학생들이 버스를 구해 멕시코시티에서 열릴 집회로 이동하던 도중 이괄라 지역 경찰의 총격을 받았다. 현장에서 일부 사망하고 43명이 사라졌다.
수사당국은 지역 마약 카르텔인 '게레로스 우니도스'와 결탁한 지역 경찰이 학생들을 납치해 경쟁 조직의 조직원으로 속인 채 게레로스 우니도스에 넘겼고, 이들이 학생들을 살해한 후 시신을 불태웠다고 밝혔다.
경찰이 무고한 학생들을 폭력조직에 넘겨 숨지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지만, 당국이 발표한 수사 결과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고 6년이 다 되도록 제대로 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 새로운 수사 결과가 속속 밝혀지고 있지만 여전히 진실과 정의에 목마른 실종자 가족들은 직접 세운 43 조형물 앞에서, 또 검찰청과 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레포르마 거리 멕시코 사회보장청(IMSS) 사무실 앞에 있는 '49 ABC' 조형물에도 아물지 않은 멕시코의 상처가 담겨있다.
2009년 6월 멕시코 소노라주의 에르모시요의 국영 어린이집 ABC에 불이 나 49명의 아이들이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생후 5개월에서 5살까지 어린 목숨을 앗아간 당시 사건은 인재(人災)였다. 어린이집엔 화재 감지기도 소화기도 없었다.
어린이집의 부실한 환경과 당국의 감시 소홀이 만든 비극이었으나 사건 직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 공분을 자아냈다.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2017년 세워진 조형물 옆에 "더는 안된다"는 문구와 함께 희생된 아이들의 작은 신발들도 동으로 제작돼 가지런히 놓였다.
멕시코증권거래소 건물 앞에 설치된 숫자 '65'는 2006년 2월 멕시코 코아우일라주에서 발생한 광산 붕괴사고를 상징한다.

폭발사고로 광산이 붕괴하며 갱도에 갇힌 65명의 광부들은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그중 시신 2구가 수습됐으나 추가 수습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광부들의 이름이 적힌 조형물은 2018년 설치됐고, 지난해 유족들은 아직 땅속에 있는 광부 63명을 상징하는 헬멧 63개를 그 앞에 추가로 놓았다.
이러한 조형물들은 당국이 아니라 주로 피해자 가족이나 시민단체 등이 설치한 것이다.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시위 장소가 되기도 하고, 지나는 이들이 꽃을 가져다놓는 추모 장소가 되기도 한다.
조형물 하나 세운다고 바뀌는 건 없다.
지난해 멕시코 예술궁전 앞엔 여성 살해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반기념비가 세워졌지만 멕시코의 여성 살해는 더 늘어났다.
그러나 외면하고 싶은 아픈 기억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대로에 전시하는 멕시코인들에게서 비극을 잊지 않고,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보게 된다.

mihy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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