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로마 유학생 전아오…기도문엔 신앙심·학업에 대한 열정 담겨
심장병으로 유학 3년만에 하늘로…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로마서 안식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3·1운동 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극심해지던 1919년 말 청년 두 명이 이탈리아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랐다.
작은 체구에 행색은 초라했지만 이들의 가슴은 장차 신부가 되어 한반도에 가톨릭 복음을 널리 전하겠다는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다.
대구대목구(대목구-교구가 설정되지 않은 지역의 교회를 일컫는 명칭) 성유스티노 신학교 학생인 두 사람의 본명은 전아오(기록상 당시 18세·제주)·송경정(19세·대구 달성군), 세례명은 각각 아우구스티노·안토니오다.
이들은 한국에서 가톨릭 교세를 넓히려면 현지 성직자가 필요하다는 교황청 뜻에 따라 사제 교육을 받고자 로마 유학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20년 1월 로마에 도착해 당시 교황 베네딕토 15세를 알현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한국의 훌륭한 사제가 되길 기도한다"며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한국인 신학생이 전 세계 가톨릭의 중심인 로마로 유학을 온 것도, 교황을 알현한 것도 한국 가톨릭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들은 로마에 있는 교황청립 우르바노대에 진학해 학업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 찬 그들의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송경정이 결핵이라는 병마를 만나 1922년 4월 한국으로 돌아간 데 이어 5월에는 전아오마저 협심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귀국 후 줄곧 투병 생활을 하던 송경정은 1923년 5월 끝내 숨을 거뒀다.
나라를 잃은 암담한 현실 속에 신앙과 복음의 끈을 놓지 않고 학업에 매진한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이후 후배 사제들에 큰 귀감이 됐다.
전아오가 우르바노대 입학 직후 쓴 자필 한글 기도문은 지고지순한 신앙과 학업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사료(史料)로 깊은 울림을 준다.
최근 이백만 주교황청 대사가 교황청의 협조를 얻어 대학 자료실에서 찾아낸 이 기도문에는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천주께서 조선에서 공부하러 온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무사히 공부를 마치게 해달라"는 취지의 소망이 담겼다.
기도문 마지막에는 "차후에 이 글을 보는 자는 이 죄인을 생각해 성모경(성모송) 한번 암송해달라"는 부탁도 있다.
이 대사는 이를 두고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듯한 글귀"라며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 특히 마음을 울린다"고 말했다.
당시 우르바노대의 모든 입학생은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학업에 임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써야 했는데 이 기도문은 전아오가 서약서 작성 약 두 달 뒤 개인적으로 덧붙인 것이라고 한다.
전아오의 기도문을 접한 비첸초 비바 우르바노대 신학원장(몬시뇰)은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쓰는 통상적인 자필 서약서 외에 본인의 모국어로 별도 기도문을 쓴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놀라워했다고 이 대사는 전했다.
이백만 대사는 로마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라노 공동묘지(Cimitero Verano)에 묻힌 전아오의 묘소도 찾았다. 사제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지구 반대편 이국땅에서 스러진 한 젊은 한인 신학생의 한이 서린 곳이다.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쓸쓸한 묘소에는 'AGOSTINO TJYEN'(1901.06.02 ∼ 1922.05.12)이라는 그의 영문명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약 100년 만에 전아오의 기도문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 이 대사는 고인의 부탁대로 성모송과 함께 묵주 기도를 바치며 넋을 기렸다고 한다.
이 대사는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제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로마까지 갔으나 끝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의 인생사가 안타깝기도 하면서 또한 무척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전아오의 성품과 학업 태도, 그에 대한 교우들의 인식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또다른 사료가 공개돼 관심을 끈다.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은 올 6월 기독교 학술지 '한국교회사 연구'에 게재한 '첫 로마 유학 신학생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1923년 발행된 우르바노대 교지 '알마 마테르'(ALMA MATER. 라틴어로 '모교'라는 뜻)를 소개했다.
여기에는 전아오를 추모하는 기사가 4쪽에 걸쳐 실렸다.
교지에 따르면 전아오는 항상 미소를 띤 인상 좋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생기와 기쁨으로 가득했기에 동료 신학생들로부터 '베이비 전'이라고 불리곤 했다.
또한 그가 한국과 가족들을 매우 사랑했으며, 가족 중에서도 특히 사랑한 어머님에 대해 무척 즐겨 말했다고 교우들은 회고했다.
전아오는 유달리 성실하고 우수한 신학생이었다는 게 함께 공부한 이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는 고국의 가족에게 편지를 그리 많이 쓰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로마에 공부를 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교우들은 "그가 학업에 매진하도록 독려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사도직에 대한 그의 열정'이었다"며 "그는 자기 나라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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