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강제이주 시작된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노예역
'일본 스파이' 누명 쓰고 쫓겨난 '아픈 역사' 안내판도 없어
[※ 편집자 주 : '에따블라디'(Это Влади/Это Владивосток)는 러시아어로 '이것이 블라디(블라디보스토크)'라는 뜻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특파원이 러시아 극동의 자연과 역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생생한 소식을 전하는 연재코너 이름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김형우 특파원 = "고려인들이 과거에 이 역사에서 중앙아시아로 많이 떠났다고 들었어. 지금도 하산하고 우수리스크에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잖아."
지난 23일 오후 러시아 연해주(州)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연해주 나데즈딘스키군 라즈돌노예역(驛) 역사 안에서 우연히 만난 백발의 노인은 고려인 강제이주에 관해 묻는 기자에게 이같이 답했다.
우수리스크에서도 멀지 않은 라즈돌노예역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서글픈 역사를 간직한 장소다.
1937년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이 느닷없이 들고나온 반제국주의 숙청작업과 함께 시작된 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처음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소련 당국은 그해 9월 9일 연해주 일대에서 가장 먼저 고려인들을 라즈돌노예역에 집결 시켜 기차에 태워 보냈다.
한 달여가 지난 10월 25일 소련의 내무 인민위원 예조프는 스탈린 등에게 한인 강제이주 완료에 대해 "러시아 극동 한인들의 이주가 완료됐다"고 보고한다.
이후에도 이주 작업이 진행돼 17만명이 넘는 한인들이 연해주 곳곳에서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터전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고려인들의 아픔을 기억한 라즈돌노예역사는 당시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채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역사에 건물 주변에는 구인·구직 광고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고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 정적만이 가득했다.
이따금 화물열차의 통과를 알리는 안내방송 소리만 이곳이 역사임을 일깨워졌다.
좀처럼 역사를 이용하는 손님도 찾기 힘들어 더욱 황량하게 느껴졌다.
커피를 팔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장사를 시작했다는 노점상은 기자에게 "고려인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이 매년 여름이면 건물을 찾았는데 올해는 바이러스 사태 탓에 한명도 못 봤다"고 말했다.
'통곡의 역'이라 불리며 한인들의 슬픔을 머금은 역사적 장소이지만 건물 주변 어느 곳에서도 당시의 아픔을 기억할만한 표지판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스탈린은 고려인들이 일본의 간첩으로 활동해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강제 이주 정책을 결정했다.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은 지난 9월 29일 고려인 추방의 역사를 다룬 특집 기사를 통해 일부 한인과 중국인들을 활용해 자국 극동에서 활발히 스파이 활동을 벌인 일본 당국에 대한 보고서가 많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동시에 대다수의 한인이 이와 무관했다는 고려인들의 목소리를 비중 있게 다뤘다.
기사에서 한 고려인은 전쟁에서 피를 흘리고 농장에서 사심 없이 최선을 다했던 조선인들 대부분을 소수의 일본 스파이들과 같이 취급한 당시의 정책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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