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에 눈떠 실리콘밸리 50회 드나들며 기술의 힘 깨달아
1970년대 일찌감치 후계자 낙점
(서울=연합뉴스) 서미숙 기자 = 세기를 넘나들며 가장 극적인 성공 신화를 쓴 최고경영자(CEO), 최단시간에 20종의 글로벌 1위 제품을 만들어낸 기업인, 잠자던 한국 경제를 깨운 신경영인, 사람이 전부라 외치던 인재양성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인내와 처세술을 실천한 전략가…
하지만, 철저한 외톨이였고 혼자됨을 즐겼던 은둔의 황제, 무노조 경영을 철칙으로 삼았던 자본가, 창업주의 그림자를 벗어나려 평생 무던히도 애쓰던 영원한 승계자, 풍부한 감성으로 영화감독을 꿈꾸던 이국의 소년…
이런 수식만으로는 삼성그룹 총수 이건희를 이해할 수 없다. 거대 '삼성왕국'을 건설하고 27년간 이끌어온 그의 리더십을 설명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1987년 극적인 2세 승계를 시작으로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라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을 거쳐, 초유의 구조조정으로 외환위기를 정면 돌파하고 밀레니엄 시대에 삼성을 글로벌 IT(정보기술) 전쟁의 최강자로 키워낸 고도의 통찰력과 설계능력, 혁신의 동력이 그의 삶 곳곳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 개와 영화에 집착했던 외톨이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호암이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하던 시절이다.
어린 건희는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다. 1945년 해방되고 어머니와 형제를 만날 수 있었다.
형으로는 제일비료 회장을 지낸 맹희 씨와 고인이 된 창희 씨, 누나로는 인희(한솔그룹 고문), 숙희, 순희, 덕희 씨가 있다. 신세계그룹 회장인 명희 씨가 유일한 동생(여동생)이다.
사업가인 호암을 따라다니며 유소년기를 보냈다. 유년기를 대구에서 보내다 사업확장에 나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947년 상경했다. 혜화초등학교에 다녔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제일제당 막내아들인 건희에겐 또래 친구가 없었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을 받들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유독 과학탐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평생 즐겨 쓴 휘호가 무한탐구(無限探究)였다. 무슨 물건이든 손에 잡히면 뜯어보고 해부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기계에 대한 관심도 그때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 첫째 형이 도쿄대학 농과대학에, 둘째 형이 와세다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어린 건희는 둘째 형과 같이 지냈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아홉 살이나 났던 만큼 외로움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외로움을 타다 보니 개를 길렀다. 개 기르기는 취미가 돼 1979년엔 일본 세계견종종합전시회에 순종 진돗개 한 쌍을 직접 출전시키기도 했다. 순종을 찾느라 150마리까지 키워보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에 심취해 일본 유학 3년간 1천200편 이상을 본 걸로 알려져 있다. 일본 막부시대 사무라이 영화가 많았다. 영화에 심취한 모습은 일본말로 '오타쿠'에 가까웠다. 마니아보다 한 술 더 뜬 수준이다.
3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편입했고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부에 들어갔으며 2학년 때는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중엔 당시 전설로 불리던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만난 일화도 있다.
럭비에도 뛰어들었다. 이 회장은 자작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년 출간)에서 "럭비는 한번 시작하면 눈비가 와도 중지하지 않는다. 걷기도 힘든 진흙탕에서 온몸으로 부딪치고 뛴다. 오직 전진이라는 팀의 목표를 향해…"라고 썼다.
당시 스포츠와 맺은 인연을 계기로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지내는 등 아마스포츠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9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는 영광으로 이어졌다.
◇ 결혼 그리고 삼성 비서실 '큰 그림을 보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어릴 적부터 길렀다. 사대부고 친구인 홍사덕 전 의원은 이 회장이 고등학교 때부터 사람공부를 하는 눈이 남달랐다고 기억한다.
호암은 학창시절의 이건희 회장에게 '미꾸라지와 메기 이론'을 주입시켰다. 어떤 농부가 한쪽 논에는 미꾸라지만 풀어놓고, 다른 쪽 논에는 미꾸라지와 메기를 같이 풀어놓았다. 천적인 메기와 뒤섞여 풀어놓은 미꾸라지는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튼실했다. 살아남으려면 메기보다 빨라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경영철학에 기초를 놓는다. 이건희 회장은 스스로 '메기'가 되기도 했고 자식들의 시험장에도 끊임없이 메기를 풀어놓았다.
서울사대부고를 나온 뒤에는 연세대학교에 합격했으나 호암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로 진학했고, 와세다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이 시절 이 회장은 자동차에 심취했다.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동차 구조에 관한 한 전문가 수준이 됐다.
미국에서 어느 대사가 타던 차량을 4천200달러에 사서 한참 타다가 600달러를 더 받고 판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유학생활 기간에 여섯 번이나 차를 바꿨다고 한다. 호사스러운 취미라기보다는 차 자체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학업을 마친 1966년 이 회장은 멕시코로 여행을 갔다가 비자문제로 미국에 재입국하지 못하고 도쿄로 향한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를 만나 맞선을 봤다. 1967년 1월 약혼을 하고 홍 여사가 대학을 졸업한 후인 그해 4월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 후 삼성 비서실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삼성그룹의 큰 그림을 보게 된다.
1970년대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빈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첨단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던 때였다.
때마침 한국반도체가 그의 레이더에 걸렸다. 조악한 집적회로로 전자시계를 만들던 한국 반도체가 파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 '삼성이 인수하자'고 건의했으나 호암은 고개를 저었다.
서른둘의 이건희는 순전히 자기 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그리고는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이전을 받아오려 애썼다. 페어차일드사에는 지분 30%를 내놓는 대신 기술을 받아오기도 했다. 256메가 D램의 신화는 이때부터 싹을 틔웠다.
삼성그룹 후계자로서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은 1978년 8월 삼성물산[028260]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시작됐다.
이병철 창업주가 위암 판정을 받고 약 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창업주는 1977년 니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건희가 후계자"라고 공식화했다.
이어 이듬해에는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해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28층에서 일을 시작했다. 창업주의 집무실 바로 옆방이었다.
호암이 일찌감치 "건희는 취미와 의향이 기업 경영에 있어 열심히 참여하여 공부하는 것이 보였다"고 회고했던 것처럼 '고행의 길'이 된 경영인의 인생은 이 회장의 천직이 됐다.
삼성의 해외사업추진위원장을 맡은 이 회장은 당시 국영기업으로 민영화를 추진하던 유공(대한석유공사)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후계자로서 능력을 검증할 기회가 온 것이다. 멕시코로 날아가 대통령과 국영석유사 CEO를 만나 원유도입선을 개척하려 했다. 그러나 1980년 동력자원부의 최종인수자 명단 발표 때 이름이 불린 기업은 삼성이 아니라 선경이었다.
호암은 충격을 받았고, 이 회장은 한동안 아버지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유공 인수전의 실패는 경영자 이건희에게 더 큰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 사카린 밀수사건과 눈 밖에 난 형들…우여곡절의 2세 승계
이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은 부회장이 되고도 9년이나 지난 뒤였다.
그가 삼성의 경영권을 승계하기까지는 엄청난 풍랑이 몰아쳤다. 입사 이후에도 20년 넘게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호암은 이 회장에게 중앙매스컴을 맡길 작정이었다.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부터 이를 권했고 실제로 이 회장은 1966년 첫 직장으로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하지만 그해 불거진 이른바 '한비 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삼성그룹의 후계구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사카린 원료 밀수가 적발된 한비 사건은 호암의 장·차남인 맹희·창희 씨가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사건 직후에는 차남인 창희 씨만 구속됐다.
이후 호암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제계에서 은퇴한다. 눈물을 머금고 한비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해야 했다.
서른여섯이던 맹희 씨는 삼성의 총수 대행으로 10여 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했다. 당시만 해도 장자상속이 대원칙이던 시절 삼성의 경영권이 장남인 맹희 씨로 넘어갈 듯 보였다.
호암은 사장단을 향해 "맹희 부사장이 거부하면 세 번 얘기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내게 가져오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암자전에선 "주위 권고와 본인 희망이 있어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봤는데 6개월도 채 못돼 맡긴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져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썼다.
맹희 씨는 그러나 자신이 6개월이 아니라 7년간 삼성을 경영했다고 달리 기술했다.
이어진 그룹의 혼란과 청와대 투서 사건 등의 여파로 장남 맹희 씨는 호암의 신임을 잃고 해외로 떠돌게 된다. 몇 차례 복귀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날아갔고 호암은 1971년 일찌감치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결단을 내린다.
부회장 이건희에게는 1982년 아찔한 순간이 닥친다. 그해 가을 어느 날 푸조를 몰고 양재대로를 달리던 그의 눈앞에 덤프트럭이 나타난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다. 차 밖으로 튕겨 나간 이 회장은 외상이 심하지 않아 2주 만에 회복했지만 항간에는 교통사고를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그때 진통제를 너무 많이 쓰자 이 회장이 마약중독이라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삼성의 2인자로 승계자 수업을 받던 이 회장에게 주변은 온통 위험투성이였다.
sm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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