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 "군부독재 시절 헌법이 불평등의 뿌리" 주장
국민투표서 압도적 찬성으로 '변화' 향한 열망 드러내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지난해 10월 18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을 도화선으로 한 대규모 시위는 '남미의 오아시스' 칠레에 곪아있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시위 발발 1년 후 칠레 국민은 곪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피노체트 헌법' 폐기와 새 헌법 제정을 택했다.
25일(현지시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80% 가까운 압도적인 찬성으로 새 헌법 제정이 결정되면서 40년 묵은 현행 헌법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현재 칠레 헌법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정권(1973∼1990년) 시절인 1980년 제정됐다. 1925년 제정된 구 헌법을 대체한 후 여러 차례 개헌을 거치며 지금까지 이어졌다.
칠레 군 총사령관이던 피노체트는 1973년 9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후 17년간 집권했다.
그의 군부 독재 기간 칠레에서는 3천 명 이상이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되거나 실종됐고, 수만 명이 고문과 감금 등 인권 탄압을 당했다.
국민 다수가 피노체트 연임에 반대한 1988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1990년 3월 피노체트가 물러나고 파트리시오 아일윈 정권(1990~1994)이 들어섰지만, 피노체트 시절과 완전한 단절은 이뤄지지 않았다.
온갖 인권 범죄와 부패 혐의를 받은 피노체트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기도 전에 2006년 91세로 자연사했다.
군부 독재 시절의 대표적인 유물인 헌법을 바꾸자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새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도 잇따랐고, 미첼 바첼레트 정권 당시에는 실제로 새 헌법 제정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끝내 성사되진 못했다.
쉽지 않았던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지난해 칠레 전역을 뒤흔든 시위 사태였다.
칠레를 군부 종식 이후 30년 만에 최대 혼란 속으로 몰아넣은 당시 시위에서 시위대는 교육과 의료, 임금, 연금 등 불평등을 야기하는 사회제도 전반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세바스타인 피녜라 대통령이 '남미의 오아시스'라고 자칭했던 칠레는 2010년 남미 국가 중 가장 먼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지만, 소득 불균형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심하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받는 교육과 의료 등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나고, 대다수 서민은 높은 생활 물가를 감당할 수 없다.
시위대는 이러한 부조리의 근원엔 헌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현행 헌법이 공공서비스 민영화와 이로 인한 불평등 심화에 책임이 있으며,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충분히 명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을 바꾼다고 당장 해결되는 것은 없지만, 국가의 뼈대가 되는 헌법부터 바꿔 칠레 사회와 경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시위대의 주장이었다.
30명 이상이 숨진 거센 시위 속에 칠레 정치권은 지난해 11월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새 헌법 제정을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새 헌법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보수층을 중심으로 한 일부는 칠레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 비해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현행 헌법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새 헌법이 실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헌법 제정 과정에서 2년가량 불확실성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은 '부조리한 안정' 대신 '변화'를 택했다.
칠레 역사의 암흑기인 피노체트 시절과 단절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새 헌법에 찬성표를 던진 나탈리아 라모스는 로이터에 "작년 시위는 안타깝게도 폭력적이었지만, 역사를 보면 폭력 없이는 중요한 변혁을 이뤄낼 수 없다. 시위대는 지난 30년간의 불평등을 일깨웠다"고 말했다.
앞으로 칠레 국민은 내년 4월 새 헌법 초안을 쓸 시민 대표들을 직접 뽑고, 2022년 또 한 번의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 초안을 수용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날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현지 방송 CNN 칠레는 지난해 시위 중심지였던 수도 산티아고의 이탈리아 광장을 비췄다. 1년 전 이맘때처럼 광장은 시위 인파로 가득했다. 그러나 작년 광장을 수놓았던 분노의 외침 대신 기쁨의 함성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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