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11·11'로 굳어져…'다이궁' 같은 국적불명 용어 남발도
'유커' '포치' 같은 중국어 발음 그대로 갖다 쓰는 관행도 돌아봤으면
(항저우=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원조인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를 넘어서 이제 세계 최대 할인 판매 행사로 불리는 중국의 '11·11 쇼핑 축제'가 11일 0시를 기해 시작됩니다.
벌써부터 한국 미디어에서는 11·11 쇼핑 축제를 가리키는 '광군제'(光棍節)라는 단어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사실 이 광군제라는 말이 이제는 막상 중국서는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유독 한국에서만 광군제라는 말을 계속 쓰고 있는 겁니다.
이 광군제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중국에서도 과거 한때 광군제라는 말이 비교적 널리 쓰이던 것은 사실입니다.
2000년대 일부 중국 대학생들이 재미 삼아 11월 11일을 연인이 없는 '싱글의 날'이라는 뜻에서 광군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합니다.
나뭇잎이 없는 앙상한 막대기를 '광군'(光棍)이라고 하는데 광군과 모습이 비슷한 숫자 1이 네 개 모인 날이라는 이유로 11월 11일을 싱글의 날인 광군제로 삼은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과거 젊은이들이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때 이성에게서 선물을 못 받은 이들이 4월 14일을 '블랙데이'로 부르며 자장면을 먹던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 현상에 착안해 중국을 대표하는 쇼핑 축제로 변화시킨 것은 바로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입니다.
'애인이 없어 서러운 날' 자신에게 선물을 해 위안으로 삼으라면서 광군제를 할인 마케팅 기회로 활용한 것입니다.
알리바바는 2009년 11월 11일에 맞춰 입점 업체들이 파격적인 할인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첫해 11·11 쇼핑 축제 판매액은 5천만 위안(약 84억원)이었습니다.
2019년 알리바바의 11·11 쇼핑 축제 거래액이 2천684억 위안(약 45조7천억원)에 달했으니 10년 남짓한 세월 매출 규모가 5천배 넘게 성장하는 거대한 성공 신화가 써진 것입니다.
이처럼 알리바바가 초기에 '싱글'에 초점을 맞춰 마케팅 전략을 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1 쇼핑 축제가 중국인 전체에게 큰 호응을 얻으면서 싱글의 의미는 퇴색됐습니다.
행사가 시작하자마자 '광클릭' 대열에 중국인 남녀노소가 대거 합류한 이상 더는 싱글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둘 까닭이 없는 것이지요.
이제 알리바바뿐만 아니라 중국의 다수 온·오프라인 업체가 가세한 11·11 할인 축제는 이제 중국에서 '솽스이'(雙十一)이라고 부릅니다.
중국 인터넷에서 검색 트렌드를 보여주는 바이두지수를 보면 언중(言衆)이 이제 확실히 광군제 대신 솽스이를 선택했음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분석 결과는 최근 한 달간 바이두 검색과 중국 인터넷 뉴스 등에 반영된 트렌드를 지수화해 보여줍니다.
파란 선이 솽스이의 트렌드를, 녹색 선이 광군제의 트렌드를 각각 지수화한 것입니다. 11·11 쇼핑 축제가 가까워져 오면서 솽스이 검색과 뉴스 노출량을 반영한 지수가 크게 올라오는 반면 광군제 관련 지수는 낮은 수준에서 평탄하게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11년 이후 10년간의 긴 시간 속 추세를 볼까요. 2013년까지는 광군제라는 단어가 지수가 높았지만 2014년부터는 솽스이가 역전해 이제는 거의 그래프 높이가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지경으로 벌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중국에서 광군제라는 말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올해로 3년 연속 중국 현장에서 11·11 쇼핑 축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광군제라는 말이 제법 익숙해진 것을 알고 있지만 이 말을 계속 쓰는 것이 맞는지 늘 고민이 있습니다.
사실 광군제의 사례는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우리 언론이 쓰는 중국어 표기에는 제법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사례를 꼽자면 '대리 구입상', '보따리상'을 가리킬 때 자주 쓰는 '다이궁'(代工)이라는 말입니다.
독자들도 '코로나19 속 돌아온 다이궁' 이런 류의 제목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중국 사람들은 보따리상이나 대리 구매상을 가리키는 다이궁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이들을 가리킬 때 '대신 사준다'는 뜻에서 '다이거우'(代購)라고 합니다.
다이궁이라는 말이 있기는 한데 주문자로부터 요청을 받아 물건을 만드는 행위를 말할 때 씁니다. 예컨대 대만 TSMC 같은 파운드리 업체가 퀄컴이나 애플로부터 주문을 받아 대신 반도체를 생산한다고 할 때 이런 말을 쓰는 겁니다.
중국 사람도 쓰지 않는 중국어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외래어처럼 쓰이는 것인데 국적 불명의 한국식 영어인 '콩글리시'(Konglish)처럼 이젠 국적 불명의 중국어인 '카이니스'(Khinese)가 등장할 판입니다.
중국인 관광객을 '유커'(遊客) 라고 부르는 것도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유커는 그냥 중국말로 '관광객'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인 여행객'을 굳이 '중국인'이라는 의미를 떼어내 '유커'라고만 부를 것이면 기사에서 미국인 관광객은 '투어리스트'로, 일본인 관광객은 '간코캬끄'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입니까.
굳이 유커를 쓰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요우커', '여우커'로 쓰지 말고 외국어 발음 표기법에 맞춰 유커로나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 나아가자면 적절한 번역 없이 중국어 발음을 그대로 가져다 기사에 쓰는 우리 언론의 광범위한 관행도 한 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연초 경제성장률 목표를 한동안 유지하던 6%대에서 5%대로 낮췄다면 중국 매체들은 '6%대 성장률 지키기' 시대에 끝났다는 뜻에서 '바오류'(保六) 시대가 끝났다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언론에서는 이런 상황을 전할 때 제목에서부터 '바오류 목표 포기한 중국' 같은 제목을 달 때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이 7위안 이상으로 오른 것을 중국어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가 '포치'(破七)라고 쓰는 경우도 잦습니다.
여러 유형의 문제를 열거해 보았습니다만 문제의 원인은 우리 미디어들이 중국어를 비롯한 현지 발음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이 속된 말로 '있어 보인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있어 보이자'고 한 게 거꾸로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 역시 과거 위에서 언급한 여러 표현을 쓴 적이 적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미중이 노골적인 패권 다툼을 벌이는 시기 한국인들이 보는 중국 뉴스는 더욱 많아질 겁니다. 우리 미디어들이, 특히 국제뉴스 분야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이 한번 자신의 관행을 돌아볼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c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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