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지역정치·정당정치 문화…상부조직·같은당 단체장에 반기
내달 1일 영구설치결의안 심의 앞두고 베를린 시민 찬바람 속 시위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베를린은 도쿄, 다른 도시들과 달랐다.
'평화의 소녀상' 지키기를 둘러싼 '베를린 모델'에는 독일식 지역 중심 정치문화, 시민사회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베를린 시민사회가 모아비트 지역 거리에 설치된 소녀상 철거 명령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하자 지역 정치권이 반응했다.
그리고 탄탄한 대의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서 지역의회의 해결책 모색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
물론, 정치 과정에 끼어드는 외부 요소인 로비와 외교도 작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 인사들은 독일 연방정부 측에 소녀상 철거 요구를 했다.
일본 측의 로비는 베를린시에도 뻗쳤다. 소녀상 관할 지역인 미테구청에도 물론이다.
그러나 소녀상 설치 허가 및 철거 문제는 어디까지나 지역정치의 몫이다. 그것도 구(區) 단위다.
특히 '베를린 모델'에서는 정당의 하부 지역 단위에서 상부 지역 단위의 의견을 묵살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정당의 구조가 수직적이지 않은 독일 정치의 단면이다.
또한, 지역단체장이 같은 당 소속이라고 해서 지지하지 않고 반대의견을 내는 모습도 나타났다.
시민사회의 여론 형성에는 독일 언론의 역할도 컸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덮으려는 그간 일본의 시도를 이번 사건을 통해 조명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네시아에 머물던 독일 여성들도 일본군의 성노예가 됐다는 사실이 독일 사회에서 처음으로 부각됐다. 일본의 로비로 시작한 일이 일본에 긁어 부스럼이 됐다.
나치 독일이 여성들에게 자행한 전시 성폭력 문제도 끄집어내졌다. 소녀상을 둘러싼 논란이 독일의 부끄러운 과거사 중 하나를 돌이켜볼 기회가 된 것이다.
◇ 같은당 지자체장·상부 정당조직에 '아닌건 아니다'
독일은 내각제이자 연방제 국가다. 의회 중심이고 지역 정치가 강하다.
중앙당의 유력 정치인들의 상당수가 청소년, 청년 시절부터 당원으로 가입해 지역정치를 경험한 뒤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기독민주당 대표 겸 국방장관이 그렇다.
사회민주당의 총리 후보로 일찌감치 결정된 올라프 숄츠 재무장관 역시 고등학생 때부터 당원으로 활동하며 지역정치를 했다.
독일에서는 지역 의원들의 자율성이 강하고 지역의회 내에서도 대화를 통한 협의 및 타협 문화가 뿌리내려 있다.
소녀상 철거 명령을 내린 미테구청의 슈테판 폰 다쎌 청장은 녹색당 소속인데, 녹색당 소속 구의원들은 미테구의회의 '설치 기한(1년) 존중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녹색당 구의원들은 시민사회의 반발이 일어나자 일찌감치 예술의 자유가 다른 나라의 정치적 의지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같은 당 구의원들이 등을 돌린 것은 다쎌 청장에게 상당한 타격이 됐다.
사회민주당 구의원들은 사회민주당이 연정의 주축인 베를린시에 반기를 들었다.
지난달 25일자 일간 타게스슈피겔에 따르면 베를린시 사회민주당 소속 고위급 인사는 지난달 12일 다쎌 청장에게 보낸 문서에서 "소녀상과 비문의 설치의 허가 철회를 명령한 미테구청의 결정을 명백히 환영한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베를린시의 입장이 일본 측 논리에 기울어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미테구의 사회민주당 지부는 비문 수정의 조건을 내걸긴 했지만 철거 명령에 반대했다. '설치 기한 존중 결의안'에 찬성한 것은 물론이다.
'설치 기한 존중 결의안'을 낸 정당이 미테구의회에서 가장 작은 해적당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 연방의회 중재 노력도…번지수는 잘못 짚어
소녀상 설치 및 철거 명령을 둘러싼 논란은 연방하원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일본 의원들이 나선 탓도 작용했을 것이다.
독일의원친선모임 사무총장인 기우치 미노루 일본 중의원 의원은 모든 미테구의원에게 영상메시지를 보내 "소녀상의 진짜 목표는 일본에 반대하는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캠페인을 펼치는 것"이라며 "예술작품이 아니라 허위사실에 근거한 감정적 조작도구"라고 주장했다.
연방하원 의원들은 독일식 중재 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번지수를 잘못 짚기도 했다.
지난달 철거 명령에 대한 시민사회 반발이 거셀 때 연방하원 녹색당의 한 의원이 당시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에게 한일 대사관 간 중재 테이블을 만들 테니 함께 논의해보자고 비공식적으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반일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한일 간의 외교분쟁 사안이라고 독일을 설득해온 일본 측 논리가 투영된 제안이었다.
이를 받아들였다면 그 순간 일본의 덫에 걸려드는 셈이었다.
특히 소녀상 설치를 전쟁 피해 여성들에 대한 보편적 인권 문제라며 독일 당국을 설득해온 시민사회의 노력에도 찬물을 끼얹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정 대사는 이를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 소녀상 운명결정 회의 앞두고 베를린 대표 광장서 시위
소녀상의 운명은 아직 확실히 결정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철거 명령이 유보된 상태다.
다만, 설치 기한인 1년간 유지될 가능성은 커졌다. 미테구의회의 설치 기한을 지키자는 결의안 채택으로 미테구청의 철거 명령은 효력을 잃게 됐다.
이제 비문 수정 여부, 영구 설치 여부 등이 남아있다.
미테구의회는 다음달 1일 좌파당이 제출한 소녀상 영구설치 결의안을 심의한다.
현재 미테구청은 비문에 전쟁 피해 여성들에 대한 보편적인 내용을 추가하는 방안을 놓고 검토하고 있다.
다쎌 청장은 지난달 13일 철거 명령 유보를 결정하면서 소녀상 설치를 주관한 현지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와 일본 측의 이익을 공정하게 하는 절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도 시민사회의 지역의회 설득 노력, 일본 측의 로비 등 여러 요소가 작용해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시민들은 25일 저녁 미테 지역으로 베를린의 가장 대표적인 광장 중 하나인 젠다르멘마르크트에서 시위를 벌였다.
영구설치 결의안 심의를 앞두고 시민사회의 염원을 전달하면서 소녀상 설치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알려나간 것이다.
100여 명의 참석자들이 소녀상을 연상케하며 의자에 앉았다. 코리아협의회, 전국적 조직의 극우반대 시민단체인 오마스게겐레히츠, 전 세계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현지 시민단체인 메디카몬디알레 회원들과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어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인근 로자룩셈부르크 거리 등에서 진행된 여성 시민단체들의 집회 및 행진에도 소녀상 지키기를 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모아비트에 설치된 소녀상과 별도로 코리아협의회의 전시관에 있던 소녀상이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행진했다.
베를린 소녀상의 존치 문제를 놓고 앞으로의 과정도 험난하겠지만 독일식 대화와 토론 문화는 확고한 정당성을 가진 소녀상 편에 가까운 듯하다.
비일란트 바그너 슈피겔지 전 아시아 특파원은 지난달 31일자 일간 타게스슈피겔의 기고글에서 "베를린은 도쿄가 아니다"라며 "미테구의 기림비를 둘러싼 논쟁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오직 투명성이다. 기림비를 억지로 치워버리는 대신 민주적인 권리를 지닌 나라에 걸맞게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것이 지금 잡아야 하는 기회"라고 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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