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볼트포럼 한국전시관, 일본·중국관 10분의1…국격 훼손 문제
독일의 식민주의 성찰 취지 어긋…역사적 맥락과 유물·현대예술 독창적 접목필요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2017년 가을 독일 수도 베를린의 도심 한복판에서 건축 중인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베를린 특파원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한눈에 왕궁이나 박물관으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외관에 거대한 삼성전자 광고판을 두르고 있었다.
옛 프로이센 왕궁터에 세워진 훔볼트포럼(Humboldt Forum)이라는 곳이었다.
당시 마침 만난 기억의 문화 연구자인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로부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독일의 자기성찰적인 공간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과거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가 비유럽권에서 저지른 약탈과 노획의 역사를 여실히 담는 공간이었다.
독일이 나치 시대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지만 식민 시대에 대해선 좀처럼 돌아보지 않는다는 비판 속에서 훔볼트포럼 프로젝트가 태동했다.
규모와 의미 면에서 베를린의 새로운 상징적인 공간으로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다. 독일에선 '21세기 최대 문화 프로젝트'로 당연시돼왔다.
훔볼트포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한국전시관도 들어온다는 점도 알게 됐다. 이후 훔볼트포럼의 공사가 차질을 빚고 개관이 지연되면서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특파원 임기 막바지인 지난 7월 말 훔볼트포럼의 한국전시관을 둘러싼 문제가 불거졌다.
훔볼트포럼의 한국관 설치와 관련된 세미나를 통해 한국관의 면적이 60㎡ 정도로 중국관과 일본관의 각각 10분의 1 크기라는 점을 알게 됐다.
훔볼트포럼 측은 보유 중인 중국과 일본 소장품이 각각 6천 점 이상인 데 비해 한국 소장품은 160여 점에 불과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2014년 훔볼트포럼 주관 단체인 프로이센문화유산재단 및 베를린국립박물관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관 설치에 협력하기 위해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다.
그런데 이후 한국관은 한국의 관련 기관들 사이에서 잊혔다. 어떤 기관도 한국관의 면적과 전시 내용을 챙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서야 한국국제교류재단(KF)이 훔볼트포럼과 세미나를 개최하며 전시 지원에 나섰다.
7월 말 세미나에서 훔볼트포럼은 160점의 소장품으로 60㎡를 채우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현대 예술을 접목시키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전시 콘셉트가 상당히 진행된 중국관, 일본관과 비교해 면적만 작게 할당 됐을 뿐 거의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일 측, 한국 측의 쌍방 과실인 셈이다.
세미나 직후 한국관 면적 등 난맥상을 기사로 다뤘고 한국에서 어느 정도 여론의 반향이 있었다. 이어 중앙정부 차원에서 관심을 가진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27일 현재 희망적인 소식이 만들어졌을까.
독일 현지에선 주독 한국문화원이 훔볼트포럼 측과 협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기관 중 유일하게 한국관 전시에 관심을 가져온 KF는 한국관 논란이 벌어진 뒤 오히려 세미나 지원을 중단했다.
그 사이 훔볼트포럼은 한국 측의 지원 없이 여러 차례 한국 작가들을 초청해 자체적으로 세미나를 열어오며 콘셉트를 잡아가는 상황이다. 더욱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면적의 추가 확보를 위해 한국문화원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이미 아시아관의 전체적인 공간의 배치는 오래전에 짜인 상황이다.
한국관 앞 특별전 공간이 남아있지만 이를 한국관으로 추가하기도 쉽지 않은 분위기다. 지금과 같은 판을 유지한다면 말이다.
다만, 한국문화원 중개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유물 대여 문제로 훔볼트포럼 측과 접촉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베를린 민속박물관에 있는 유물 가운데 아직 발견되지 않은 한국 유물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국내 기관이 조사를 검토하고 있다.
◇ 촉박한 시간…예술계·학계 공론화 필요
훔볼트포럼은 12월 중순부터 순차적으로 개관한다. 아시아관의 개관에는 최소 몇 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제 남은 시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베를린 현지 학자 및 예술인들은 공론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많은 현지 예술인은 훔볼트포럼 한국관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특히 훔볼트포럼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독일 측에도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더욱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에 이어진 분단 상황, '한강의 기적', 디지털 강국, 한류 등으로 이어지는 질곡과 극복의 역사가 빠진다면 훔볼트포럼의 취지 자체가 반감될 수 있다.
피지배 국가였던 한국의 전시관이 갈피를 못잡는 반면, 일본관 내 설치 예정된 다도 전시관이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 피해와 연결된 평화의 의미를 담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 출처도 알려지지 않은 소장품…유물·현대미술 아우른 젊은 상상력 필요
현재 한국관을 둘러싸고 이해관계자들 간 논의가 이뤄지는 구조에서는 유물의 숫자와 유물의 가치가 중시되는 분위기다.
그런데 현재 훔볼트포럼으로 향할 베를린 아시아미술관의 한국 소장품들은 출처도 정확히 모른다.
한국에서 불법으로 반출된 것이 있는지, 외세에 노획된 유물이 독일까지 흘러들어온 경우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소장품 간 연결되는 맥락이 있는지도 베일 속이다.
이에 대해 훔볼트포럼 측으로부터 정보를 받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이 선행되어야 기존 소장품과 대여 유물, 현대미술 등을 접목하는 과정이 원활해진다.
추가 공간 확보가 우선이지만 실패한다면 다른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천장도, 기둥도 예술을 위한 공간이다.
국제적으로 한국은 콘텐츠 분야에서 점점 더 강점을 보인다. 현대예술은 콘텐츠 싸움이다. 더구나 현대예술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디지털도 우리의 강점이다.
유물, 현대미술, 콘텐츠를 역사성을 담으면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조화롭게 엮어 스토리를 만든다면 관람객들에게 새롭게 다가갈 수 있다.
이미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영국 국립박물관은 고대 유물과 현대 미술과의 접목을 시도해 호평을 받았다.
소장품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몇십 개 더 추가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 나온다.
작지만 창조적인 한국관은 유물 중심의 중국관, 일본관과는 한층 다른 차원의 신선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
다른 국가의 문화사업에 일일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훔볼트포럼은 공공의 자원이 들어간 것이다. 독일 국가를 대표하는 공간에서 한국 문화에 대해 다룬다.
이 공간이 한국 문화를 왜곡하고 수치를 안겨줄 수 있다면 항의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식민시대의 성찰을 담고 있는 공간이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면 말이다.
특히 훔볼트포럼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국가 등과 활발하게 전시에 대해 논의를 해왔고, 이 과정에서 일부 국가와는 약탈 문화재에 대한 반환 문제까지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중국관, 일본관의 규모와 지금까지 알려진 전시 구상을 보더라도 훔볼트포럼이 상당히 신경을 쓴 반면 한국관에 대해선 그렇지 않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사실상 근대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얼마나 고찰을 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베를린 특파원으로서 마지막 기사다.
개관한 훔볼트포럼의 한국관 모습을 한국에서 사진이나 영상으로 지켜볼 듯하다.
언젠가 베를린에 들른다면, 훔볼트포럼을 방문할 동기가 생겨날까. 몇 개월 안에 달린 것 같다.
lkbi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