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구매 약속 '반쪽 이행'…미 일각선 "과도한 중국 수출 의존"
일촉즉발 신냉전 속 미중 최악 충돌 막는 안전판 역할 평가도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작년 12월 15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의 이스트룸.
배석한 미중 양국 각료들의 박수 속에서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떨떠름한 미소를 띤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가 각자 서명이 담긴 합의문을 취재진 앞에 들어 보였다.
2018년 7월부터 1년 반가량 이어지며 세계 경제에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 미중 무역전쟁을 봉합하는 1단계 무역 합의가 체결된 순간이었다.
미중 경제 갈등을 완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은 미중 1단계 무역 합의가 체결된 지 1년이 지났다.
통상 분야에서 시작된 미중 갈등은 완화되기는커녕 노골적인 패권 다툼 성격의 신냉전으로 비화한 가운데 1단계 무역 합의는 미중 관계 파탄을 막는 거의 유일한 고리 역할을 하면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
◇ '동상이몽'…"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자" vs "돈 주고 시간 벌자"
1단계 합의는 양국 간 관세 난타전을 더 악화시키지 않는 것을 전제로 중국이 미국에서 대량의 상품·서비스를 추가 구매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적용 중이던 상호 고율 관세를 철회하는 것이 아니라 '종전'보다 '휴전'에 가깝다.
1단계 합의에도 총 3천700억 달러 규모의 중국 제품에 대한 미국의 고율 관세는 미국의 차후 협상 지렛대로 계속 유지됐다.
중국은 1단계 합의 이행 기간인 2020∼2021년 두 해에 걸쳐 공산품, 농산물, 에너지 상품, 기타 상품 등 총 2천억 달러(약 217조원)어치의 미국 상품과 서비스를 '추가 구매'하기로 했다.
2020년의 경우 추가 상품 구매 목표액은 639억 달러다. 추가 구매 판단 기준은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해인 2017년이다.
이에 따라 올해 중국은 미국에서 2017년 한 해 전체 수입액인 951억 달러(이하 미국 수출 기준)에 추가 구매를 약속한 639억 달러를 더해 총 1천590억 달러어치를 수입해야 한다.
합의 결과만 놓고 보면 중국이 미국의 강공에 밀려 크게 양보한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과 직접 1단계 합의문에 서명하고자 하는 뜻을 내비쳤지만 시 주석은 대리인으로 류허(劉鶴) 부총리를 백악관에 보냈다.
이는 전쟁 강화 조약처럼 비칠 수 있는 합의문에 시 주석이 직접 서명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꺼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1단계 무역 합의를 맺는 미국과 중국의 속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미국은 고질적 무역 불균형을 일거에 바로잡는 데 그치지 않고 추가 협상을 통해 중국의 불완전한 시장 개방, 국영기업 보조금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은 이와 거리가 있었다. 한 외교 소식통은 "1단계 무역 합의는 중국이 미국에 돈을 미끼를 던져주고 시간을 벌려는 측면이 강했다"고 지적했다.
또 중국이 미국산 제품 구매를 대량으로 늘린다고 해도 실질적 부담이 갑자기 커진 것만도 아니다.
브라질산 대두 대신 미국산 대두를, 중동산 원유 대신 미국산 원유를 도입하는 식으로 구매선을 조정해 상당한 충격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해 극단적 불확실성이 상당히 걷힐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면서 중국 측은 추가 협상 가능성에도 한층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중국 정부의 고문인 정융녠(鄭永年) 글로벌 및 당대 중국고등연구원 원장은 남방재경(南方財經) 인터뷰에서 "현재 (미중 무역) 협상이 재개된다면 중국은 더 유리한 고지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일부 하이테크 기술과 지식재산권 보호 측면에서만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중국 구매 약속 이행 50%대 그쳐…신냉전 속 합의 '위태'
1단계 무역 합의는 이행 초기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라는 예기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중국 경제가 지난 1분기 사실상 멈춰서면서 중국의 미국 상품 대량 구매 이행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2분기부터 중국 경제가 서서히 정상화됐지만 미국과 중국 간 신냉전이 본격화하면서 1단계 무역 합의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극도로 복잡해졌다.
코로나19 세계 확산 책임론을 두고 시작된 미중 갈등은 외교·군사·기술·통상·인권 등 전 분야로 확대됐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은 지난 7월 캘리포니아주 요바린다의 닉슨 도서관에서 '중국 공산당과 자유세계의 미래'를 주제로 연설하면서 "시진핑 총서기는 파산한 전체주의 이념의 진정한 신봉자"라고 강렬히 비판했다.
미중 데탕트를 주도한 닉슨을 기념하는 시설에서 한 이런 강경 연설은 40년 미중 관계의 물길을 되돌리는 신냉전 선포 선언이라는 평가가 많다.
미중 관계가 1979년 수교 이래 최악으로 악화한 가운데 1단계 무역 합의는 아슬아슬 유지됐다.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1단계 합의 이행 의지가 있다는 주장하면서도 약속된 만큼 미국 제품과 서비스 구매를 빨리 확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국이 적대적 행위를 멈춰야 무역 합의가 제대로 이행될 수 있다면서 우회적으로 미국을 압박했다.
외교가에서는 중국이 1단계 합의에 집착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약점을 이용해 이를 미국의 극단적 공세를 막는 도구로 활용한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결과적으로 위태롭게나마 유지되고 있는 1단계 무역 합의가 미중 관계가 완전한 파국을 치닫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가운데 1단계 합의 이행 상황을 중간 점검해 보면, 중국의 약속은 전체적으로 반쯤밖에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워싱턴 싱크탱크인 피터슨국제연구소(PIIE)가 지난 4일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10월 중국의 미국 상품 수입액은 710억 달러(미국 수출 기준)으로 10월 말까지 목표액의 57%에 그쳤다.
흥미로운 것은 전체 이행률이 60%에 채 미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특별히 홍보하던 농산물 분야 이행률만은 71%에 달해 유독 높다는 점이다.
중국은 미 대선을 앞두고 최근 수개월간 미국산 대두와 수수, 옥수수 구매량을 급격히 늘렸는데 이는 자국의 곡물 부족 현상을 해소함과 동시에 1단계 무역 합의 의행 의지가 있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미국 측에 선전하기 위한 행동으로 분석된다.
1단계 무역 합의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미국의 고질적 대중 무역 적자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었지만 아직 눈에 띄는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중국이 최근 미국에서 옥수수와 원유 등 구매를 크게 늘렸지만 전체적으로 중국의 수출이 더 빠르게 늘어나 11월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374억2천만 달러로 전달의 313억7천만 달러보다 커졌다.
그래도 중국이 정책적으로 미국 상품 구매를 늘리는 것은 사실이기에 미국 업계에서는 1단계 무역 합의 유지 기대가 큰 편이다.
중국 내 미국 기업들을 대표하는 미중비즈니스카운슬의 크레이그 앨런 회장은 로이터 통신에 "그들이 (이행에) 뒤처져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2년짜리 합의"라며 "중국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성공적인 합의"라고 말했다.
하지만 농업과 에너지 등 특정 산업이 지나치게 중국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있다.
1단계 무역 합의의 영향으로 중국은 최근 미국의 대두, 수수, 원유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특히 중국은 올해 미국산 대두 3천만t을 구매했는데 이는 미국 전체 수출량의 57%에 해당한다.
미중 신냉전 속에서 홍콩·남중국해·대만 등 미중 갈등 요인이 끊임없이 표출되는 가운데 중국이 어느 순간 거꾸로 자국의 구매력을 무기화해 미국을 압박할 수도 있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지적하기도 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바이든 행정부의 초대 농무장관으로 내정된 톰 빌색은 "미국 농업은 너무 많은 계란을 중국이라는 바구니에 담는 데 조심해야만 한다"며 "지난 수년간 우리가 배운 교훈은 미국 농업이 계속 (판매처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c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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