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WHO 웹사이트 공개됐다 삭제…英가디언 "이탈리아-WHO 공모 의심"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와 관련해 이탈리아 정부에 방역 매뉴얼이 전무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서가 은폐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1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이탈리아 출신 프란체스코 참본 등 유럽지역 WHO 소속 과학자 11명은 지난 5월 13일 '전례 없는 위기: 이탈리아의 코로나19 초기 대응'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WHO 웹사이트에 올렸다.
102쪽 분량의 이 보고서에는 이탈리아 정부의 전염병 대응 매뉴얼이 2006년 이래 한 번도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덮치자 일선 병원들은 우왕좌왕하며 대혼란에 빠졌고, 그 사이 희생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것이다.
유독 이탈리아에서 왜 그렇게 바이러스 피해가 컸는지를 정부 대응 실패에 초점을 맞춰 분석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다른 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이 보고서는 얼마 후 WHO 웹사이트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배경에 대해 가디언은 이탈리아 보건부 고위 관료 출신으로 WHO에서 전략 대응 업무를 맡은 라니에리 게라 국장의 요청으로 해당 보고서가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의심스러운 상황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코로나19 인명 피해와 관련한 정부 과실을 수사하는 이탈리아 베르가모 검찰이 이 보고서의 존재를 파악하고 참본에게 참고인 출석 요청을 했으나 WHO 측은 국제공무원의 면책특권을 언급하며 출석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참본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검찰에서 첫 출석 요청이 왔을 때 이를 WHO 법무팀에 보고했더니 면책특권이 있어 출석할 필요 없다는 답변이 왔다"며 "나 스스로는 검찰에서 진술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아울러 게라 국장이 보고서 내용을 수정하지 않으면 해고될 수 있다는 협박을 했다는 주장도 폈다. 이러한 사실을 WHO 고위 관계자들에게 알렸지만 어떤 내부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참본과는 달리 게라 국장은 베르가모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참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WHO가 이탈리아 정부에 불리한 보고서를 은폐하고자 공모했을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다는 대목이다.
이번 일에 대해 이탈리아 보건부는 "우리가 아는 한 해당 보고서는 WHO 공식 문서가 아니며 우리에게 전달된 적도 없다"면서 관련성을 부인했다.
WHO는 문제의 보고서가 웹사이트에서 삭제됐을 당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다가 지난주에야 보고서에 부정확하고 모순된 내용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냈다.
WHO는 보고서 발행과 삭제 과정에서 혼란이 야기됐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 보고서 발행 프로세스를 개선했다고 설명했다.
은폐 여부와 관계없이 베르가모 검찰이 이 보고서를 코로나19 대응에서의 정부 과실을 뒷받침하는 핵심 물증으로 삼을 경우 역대 총리와 보건장관이 줄줄이 수사선상에 오르는 등 가공할만한 후폭풍이 예상된다.
11일 기준 이탈리아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는 180만5천873명, 총사망자 수는 6만3천387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 수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것이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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