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거리에서 만난 태국 반정부 시위대 "민주주의·변화"

입력 2020-12-26 08:00  

[특파원시선] 거리에서 만난 태국 반정부 시위대 "민주주의·변화"
소극적이란 평가 받던 1020세대 적극 참여…내년에도 열기 뜨거울 듯



(방콕=연합뉴스) 김남권 특파원 = 2020년 하반기 태국 사회는 '민주주의와 변화'를 외친 반정부 시위대의 함성으로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반정부 시위는 올 2월 젊은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던 야당인 퓨처포워드당(FFP)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강제 해산된 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됐다가 7월 중순 재개된 뒤, 총리 퇴진과 군부헌법 개정은 물론 금기시됐던 군주제 개혁 요구까지 분출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기자도 거리 시위로 본격 전환한 9월 중순부터 이달 중순까지 약 10차례 현장을 찾아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정치적 의사 표시에 소극적이어서 외신이 '고분고분한'(docile)이라고 평가해온 태국의 1020(10대와 20대) 세대가 적극적으로 바뀐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일련의 시위 과정에서 9월 19일 방콕 도심 왕실 옆 사남루엉 광장에 2만여 명이 모여 군주제 개혁을 외친 것은 예상 밖이었다.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의 대관식 행사가 열렸던 장소에서 1년4개월여 만에 군주제를 개혁하라는 외침이 울려 퍼지는 걸 두 눈으로 보면서 '변화'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10월 14일 정부 시설이 모인 랏차담넌 거리에서 진행된 시위도 국내외 취재진의 눈과 귀를 잡아끌었다.



차 벽 바리케이드가 시위대 위세에 무너지면서 1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쁘라윳, 억빠이'(쁘라윳 총리 퇴진하라는 뜻)를 외치며 총리 청사까지 물밀듯 움직이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10대 여학생은 "쁘라윳 총리는 국민들이 낸 세금을 가지고 국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국왕만을 위해 사용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튿날인 10월 15일 방콕 중심 상업지구 랏차쁘라송 4거리 시위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날 새벽 정부는 5인 이상 정치집회를 금지하는 비상포고령을 발동했다. 엄포이자 경고였다.
이에 반정부 시위가 무산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현장을 찾았다.



그러나 기우였다. 2명의 피켓 시위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경찰 저지선을 밀어내며 저녁에는 사방 100~200m가 인파로 찼다.
특히 1020 세대가 눈에 띄게 늘어난 점이 놀라웠다. 교복 차림에 손팻말이나 태블릿을 이용해 정부를 비난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평소 젊은 층의 왕래가 잦은 곳이긴 하지만, 정부의 강경 대응이 오히려 숨죽이던 1020 세대들을 거리로 끌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26일 국왕의 독일 체류와 관련한 조사를 촉구하며 1만여명이 2㎞를 행진하는 현장을 따라갔을 때에는 인도 변에 있는 시민들 다수가 손뼉을 쳐주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11월 25일 방콕 시암상업은행(SCB) 본사 앞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는 가장 민감한 사안인 군주제나 왕실모독죄에 대한 시위대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태국에서는 왕실 인사나 왕가에 대한 부정적 묘사 등을 금지한 왕실모독죄를 어기면 최장 15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벨(24)씨는 왕실모독죄가 무섭다고 솔직히 말하면서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매랙(62)씨는 서민층에게 인기를 끈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레드셔츠라고 소개했다.
군주제 개혁이 성공할 거 같으냐는 물음에 그는 "이번에 당장 이뤄지기는 어렵다고 본다"면서도 "전에는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 물음에 대한 반응은 벨씨도 비슷했다. 그는 "구체적 결과는 오래 걸릴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가 군주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같은 생각을 한 것이 의의"라며 이미 성공을 거뒀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달 2일에는 헌재 판결이 시위대를 거리로 이끌었다.
쁘라윳 총리가 전역 이후에도 군 관사에 거주한 것은 특혜를 금지한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야당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로 위에 쓰인 '지금 태국 민주주의는 울고 있다'는 영어 문구가 강렬했다.
도로에 엎드려 분필로 정의로움에 관해 적고 있던 방콕대 2학년 얀얀(19)은 기자에게 "군인과 경찰 같은 힘 있는 이들에겐 착하고,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이들에겐 나쁜 존재가 태국 사법부"라고 힐난했다.
쇼핑몰 장식 등을 하는 비주얼 머천다이저 쩨이(35)씨 역시 "법이 공평하지 않아 화가 난다"며 민주주의를 위해, 국가발전과 변화를 위해 앞으로 시위에 계속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가이드인 서니(56)씨도 "시위를 해야 할 이유가 더 생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반정부 시위대가 요구하는 3대 요구사항은 모두 해결이 쉽지 않다.
쁘라윳 총리는 퇴진 요구를 일축했고 그나마 현실성이 있다고 평가받던 개헌 작업도 크게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가장 휘발성이 강한 이슈이면서도 국왕을 신성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성과를 내기 가장 어려운 군주제 개혁은 '왕실모독죄 무더기 적용'이라는 암초를 만난 상태다.
그러나 시위대, 특히 인터넷으로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하고 SNS를 통해 많은 이들과 생각을 공유하는 1020 세대의 변화 열망은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시위 지도부도 "내년에 더 격렬하게 반정부 시위를 벌이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헌재 판결에 화가 나 혼자 지상철을 타고 시위장에 왔다는 쩨이씨와 같은 이들 때문에 내년에도 태국 거리는 변화와 민주주의의 외침으로 뜨거울 것 같다.
south@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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