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공조·협력 대신 국가 이기주의에 빠져 화근 불러
마스크 미착용 등 코로나 경시한 지도자도 악화 한몫
'유일한 희망' 백신 보급에서 국가 간 불균형 여전
집단면역 달성해도 코로나19와 공생해야 할 듯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정성호 특파원 =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해 9월 열린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국제적 협력의 분명한 시험이었다"라며 "우리가 사실상 낙제한 시험"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국가 간 협력·공조의 시험대였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는 것이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전 세계적 준비 태세와 협력, 통합과 연대의 부재"를 코로나19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도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가 여행금지 조치, 물자의 수출 통제, 정보의 독차지와 통제, 세계보건기구(WHO)와 다른 다자주의 기관들의 변방화 등에 경쟁적으로 나서며 대응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전 세계 감염자가 1억명에 육박할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면서 인류 최악의 전염병 사태 중 하나가 된 데는 이처럼 국가 이기주의가 위세를 떨치며 공동 대처에 실패한 점이 꼽힌다.
시야를 좁혀 국가 단위로 내려오면 지도자들의 대처도 중요한 변수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코로나19가 '독감의 일종'이라거나 '곧 사라질 것'이라며 사안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결국, 미국이 선진적 의료 체계를 갖추고도 세계 1위의 감염자(약 2천500만명)와 사망자(약 42만명)를 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제 성적표를 재선의 필승 카드로 본 트럼프는 과학자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대신 자신의 정치적 어젠다를 우선순위에 두고 주지사들에게 봉쇄 조치를 서둘러 풀고 경제를 재가동하라고 다그쳤다.
또 글로벌 팬데믹 대응을 이끌던 세계보건기구(WHO)를 탈퇴하며 전 세계적 공동 대처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비슷한 태도로 역시 마스크 착용을 거부한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있는 브라질은 미국과 인도에 이어 감염자 수가 세계 3위다.
반면 코로나19의 실체를 인정하고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 뉴질랜드는 지금까지 확진자가 2천200여명에 불과한 수준이다. 세계 1위 미국과 견주면 거의 1만분의 1 수준이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마스크의 효용을 간과하고 착용을 기피한 점도 확산의 불을 지피는 '땔감'이 됐다. 사태가 시작된 지 1년을 넘긴 지금 이들 국가의 이름은 감염자가 가장 많이 나온 나라 명단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막 접종이 시작된 백신은 팬데믹 사태를 끝낼 유일한 희망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 간 백신 보급의 불균형은 심각한 문제다. 이미 부유한 국가들이 백신을 선점하면서 가난한 나라들은 백신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가 국경을 가리지 않고 넘나든다는 점에서 이런 불균형은 지구촌 차원의 코로나19 집단면역을 지연시킬 공산이 크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인구 3억3천만명의 미국은 이미 접종자가 2천만명을 향해 가지만, 미국 바로 밑에 있는 인구 1억3천만명의 멕시코는 50만회분의 백신을 확보하는 데 그쳤고 그중 절반 정도만 접종한 실정이다.
AP 통신은 부유한 국가에서는 긴 대기 줄과 부족한 예산, 주·지방 정부의 땜질식 처방 등으로 백신 접종 드라이브가 방해받고 있지만,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걸림돌이 훨씬 더 크다고 지적했다.
빈약한 의료시스템, 무너진 대중교통망, 만성화한 부패, 백신을 차갑게 보관하는 데 필요한 전기의 부족 등 문제가 덤으로 추가된다는 것이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백신 국가주의는 자멸적이며 전 세계적인 회복을 지연시킬 것"이라며 "과학은 성공하고 있지만 연대는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백신을 맞더라도 코로나19가 종식되지는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영국 런던위생·열대의학대학원의 전염병학자인 데이비드 헤이먼 교수는 백신이 나오더라도 바이러스의 운명은 '엔데믹'(endemic·토착 질환)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헤이먼 교수는 "코로나19의 운명은 엔데믹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것은 인간 세포 안에서 번식하며 계속해서 변이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겐 생명을 살릴 도구가 있다"며 "이 도구와 양호한 공중보건 조치는 우리가 코로나19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이 역시 잠재적 위험 요인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개발된 백신의 효력을 약화하지 않는 것으로 과학자들은 판단하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 변이가 일어나면서 백신이 무력화할 수도 있다.
sisyph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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