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시위 성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삼엄한 경계 속 평온
시민들 "10년 전보다 경제 안좋다" 불만…발원지 튀니지 반정부 시위 지속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물가는 오르고 공무원은 더 부패해지고 서민의 살림살이는 10년 전보다 더 안 좋습니다."
이집트 카이로 시내 타흐리르 광장 근처에서 만난 한 중년 남성은 10년 전 '아랍의 봄' 시위가 이집트인들의 삶을 바꾸지 못했으며, 오히려 지금의 삶이 그 전보다 더 어려워졌다고 하소연했다.
타흐리르 광장은 2011년 1월 25일 '코샤리 혁명'으로 불리는 이집트 민주화 시위가 시작된 성지다.
10년 전 이곳에 모인 수만 명의 시위대는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장기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민주화 시위 10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타흐리르 광장은 평화로웠다. 광장 오른편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난 도로에는 차량이 쉴 새 없이 오갔고, 코로나19 대유행 속에도 인근 인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민주화 시위 당시 많은 사람이 희생됐던 인근 모하메드 마흐무드 거리는 주차된 차량이 점거하고 있었다.
보행자용 신호등이 고장나 있는 도로를 건너 오벨리스크 쪽으로 다가가자 정복 및 사복 차림의 경찰관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었다.
한 사복 경찰관은 오벨리스크 앞에서 3∼4명의 여성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자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고 채근했다. 이들은 카메라는 물론 휴대전화를 이용한 촬영도 제지했다.
오벨리스크 뒤쪽에는 기관총을 탑재한 장갑차도 눈에 띄었다.
인근 상점에서 만난 한 남성은 "오늘은 정말 많은 경찰관이 배치되어 있다. 평소엔 경찰관들도 시민들을 향해 웃지만, 오늘은 표정이 굳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의 강화된 통제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민주화 시위 10주년 시위나 집회를 차단하기 위해서인지 묻자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이집트의 경제 상황은 민주화 시위 이후에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2016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12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기로 합의한 뒤에는 엄격한 긴축 조처로 물가 상승에 대한 불만이 고조돼 왔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이집트인 3명 중 1명은 아직도 하루에 1.4달러 미만의 돈으로 생활하는 극빈층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이집트의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인 관광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민주화 시위 후 선거를 통해 집권한 무함마드 무르시를 쿠데타로 축출한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적지 않지만, 군부를 등에 업은 엘시시 정권의 힘이 워낙 막강한데다 코로나19를 이유로 한 통제 때문에 시위 10주년은 조용히 지나가는 형국이다.
오히려 카이로 시내 곳곳에서는 경찰의 날(1월25일)을 앞두고 정복 차림의 경찰관들이 시민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정부의 무능과 공무원의 부패를 성토했다.
외국인 밀집 지역인 마아디 인근에서 만난 한 남성은 "물가는 오르고 공무원들은 더 부패해졌다. 서민의 살림살이는 무바라크 정권 때보다 더 안 좋다"며 "오히려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졸업하면 두바이나 한국 등 해외로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여기엔 희망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랍의 봄' 시위의 발원지인 인근 튀니지의 사정도 이집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시위 이후 경제 상황은 계속 악화했고 청년들은 일자리에 목말라하고 있다.
시위로 독재자인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이 물러난 지 꼭 10주년이 되는 지난 14일 튀니지 주요 도시에서는 젊은이들의 시위가 본격화했다.
시위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무능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지만, 정부는 시위 참가자 600여 명을 체포하는 한편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명분으로 야간통금 등 봉쇄조치를 연장하고 시위를 중단하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정부의 경고에도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IMF는 이날 튀니지 정부에 성장을 독려하고 빈곤을 줄이라는 권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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