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극복을 위한 백신 접종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 아랍국가의 백신 패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가 개발한 백신의 '집단면역 시험장'을 자처한 이스라엘과 일부 부유한 중동국가들의 선택을 받은 가운데, 중국 시노팜의 백신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보관·운송의 편의성을 무기로 시장을 넓히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정부 때부터 지속된 미국 백신 외교의 부재를 틈타 이 지역에서 중국이 부쩍 영향력을 키웠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6일(현지시간) 현지 언론과 AFP통신 등에 따르면 중동에서는 이스라엘 이외에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쿠웨이트, 오만 등이 미국 화이자의 백신을 들여와 접종을 진행 중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화이자에 접종 관련 데이터를 실시간 제공하는 조건으로 대규모 물량을 확보해 빠른 속도로 접종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1차 접종을 마친 인원은 266만여 명, 2차 접종자는 122만여 명이다.
이라크,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은 화이자 백신과 중국 제품을 동시에 사용 중이며, 이집트와 모로코는 시노팜 제품만으로 대국민 접종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서방 국가는 개발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코로나19 백신 선택의 최우선 기준으로 안전성을 고려한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 국가들도 안전성 검증이 우선시되지만, 이 밖에도 가격과 백신 운송 및 보관상의 편의 등도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된다.
여기에 '백신 외교'도 한몫을 하는데, 특히 중국은 적극적인 백신 외교로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국-중동 관계 전문가인 야히아 주비르는 "팬데믹 이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자국 내에 갇혀 있었지만, 중국은 보건 외교단을 파견해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며 "중국은 (미국보다) 훨씬 적극적이었고 훨씬 협조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중국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마스크 등 다양한 보건용품을 수출하거나 무상 공급했고, 다양한 국가에서 온라인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주비르는 "요즘은 새로운 실크로드(일대일로 정책)와 함께 보건 실크로드가 생겼다"며 "보건 분야가 중국 외교 정책의 일부가 되면서 친구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고 부연했다,
이런 중국의 움직임을 미국이 경계한다는 분석도 있다.
또 다른 중국-중동 관계 전문가인 조너선 풀턴 UAE 자예드 대학 교수는 "미국 동맹들에 중국과 협력하지 말라는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며 "하지만 미국이 자체적인 코로나19 대응에 허덕이는 와중에 중국은 (중동국가에) 힘이 되고 신뢰할만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함께 중국은 미래를 내다보며 중동에서 존재감을 과시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중국은 보건 산업 기반이 취약한 이 지역에 백신 생산 및 유통 시설 건립 등 협력 과제를 제시하면서 영향력을 키운다는 게 분석가들의 견해다.
미국 외교·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미국외교협회(CFR)의 스티븐 쿤 선임연구원은 "중동 사람들은 그동안 지구촌의 앞서가는 기술 강국이자 문제 해결사로 미국을 봤다. 하지만 백신 외교에 관한 한 미국은 그곳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미국이 오랫동안 그런 지위를 누리던 지역에서 이제 중국이 분명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며 "이는 대체로 국제적인 협력과 과학을 평가절하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이외에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앞세운 영국과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손에 든 러시아도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
러시아의 오랜 우방인 알제리는 중국산과 함께 화이자, 모더나 백신보다 가격이 싼 러시아산 백신을 주문해 놓은 상태다.
또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과 관계가 악화한 팔레스타인 주민들도 러시아산 스푸트니크 V 백신을 기다리고 있다.
다만, 최근 출범한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이전 정부의 전략을 대폭 수정할 경우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백신 외교에 변화가 올 수 있다.
풀턴 교수는 "아직 게임이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미국의 중동 및 북아프리카 전략 변화를 예상했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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