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판 행정고시 경쟁률 급락…"심야 근무 줄여야"
'바쁜 초년 공무원' 오전 7시∼새벽 3시 살인적 근무환경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가스미가세키'(霞ヶ關)가 미래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
가스미가세키는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의 중앙 행정기관 밀집지 지명인데 통상 일본 관료조직 전반을 칭하는 대명사로 쓰인다.
위기가 부각되는 이유는 취업시장에서 공무원의 인기가 시들하기 때문이다.
정년이 보장되고 근속 기간이 늘면 급여와 직급이 대체로 상승하는 안정된 직업인데 인기가 없다는 것은 언뜻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공무원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인사원의 연차보고서 등에서 젊은이들의 공직 기피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관료 조직의 허리 역할을 하는 종합직 채용에서 특히 문제가 심각하다.
종합직은 중앙행정기관의 간부 후보로 채용돼 정책 기획·입안 등을 담당하며 승진 속도가 빠르다. 한국으로 치면 국가공무원 5급 공개경쟁채용(옛 행정고시)과 비슷한 공직 입문 경로라고 볼 수 있다.
종합직 지원자는 2012년도에 2만5천110명이었는데, 2020년도에는 1만9천902명을 기록해 20.7% 감소했다.
최종합격자 수는 2012년도 501명, 2020년도 1천880명이었다.
평균 경쟁률은 50.1 대 1에서 이제 10.6대 1이 됐다. 8년 사이에 경쟁률이 약 5분의 1 수준으로 낮아진 것이다.
사무처리 등 정형화한 업무를 담당하는 일반직 지원자(대졸 기준)도 8년 사이에 3만9천644명에서 2만8천521명으로 확연하게 줄었다.
참고로 2020년도 한국 국가공무원 5급 공개경쟁채용 경쟁률은 26.3 대 1이었다.
인사원은 지원자 수 감소에 관해 "민간기업 고용상황 변화에 따라 변동하지만 저출생이나 공무를 둘러싼 엄혹한 상황에서 중장기적으로 감소 경향"이라고 분석했다.
공무원을 선택한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신규 임용자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2020년)를 보면 국가공무원이 된 이유를 최대 3개까지 선택하게 했더니 '공공을 위한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66.1%로 가장 많았고 '일의 보람'을 꼽은 이들이 55.5%로 뒤를 이었다.
급여 등 근무 조건이 좋아서 국가 공무원을 택했다고 답한 이들은 7.1%에 불과했다.
근무 환경은 공무원을 기피하는 요소로 보인다.
실제로 공무의 매력을 높이고 우수한 인재를 획득하는 방안이 무엇이냐는 물음(복수 선택)에 75.1%가 '초과근무나 심야근무 감축'을 꼽았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일본 공무원과 민간 기업 급여 수준을 살펴볼 자료가 있어서 소개한다.
2019년 국가공무원 급여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일반직 직원의 급여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 공무원의 평균 연령은 43.1세이고 평균 근속연수는 21.3년이다. 또 월평균 급여는 봉급에 주요 수당을 포함해 41만7천683엔(약 445만6천원)이었다.
이와 별도로 전체 공무원의 81%가 받는 통근 수당은 평균 1만4천123엔(약 15만원)이고, 이밖에 초과 근무 수당 등이 있다.
민간 기업의 사무계장(약 39만엔, 통근·시간 외 수당 제외, 이하 동일)이나 기술계장(약 41만엔)과 엇비슷한 수준(출처 '직종별 민간급여 실태조사')이었다.
공무원 평균 급여는 2012년도까지는 상승세가 뚜렷했으나 이후 정체 상황이고, 최근에는 약간 줄어든 경향도 보인다.
후생노동성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다 재작년에 사직한 센쇼 야스히로(千正康裕·46) 씨의 저서 '블랙 가스미가세키'에서 일본 공직 사회가 봉착한 문제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사립 명문 게이오(慶應)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2000년 국가공무원 시험 1종(현재의 종합직)에 합격해 가스미가세키에 발을 들였다.
연금, 육아, 근로 관행, 아동 복지, 의료 등에 관한 중요 법률 개정에 참여했고 정무관(차관급) 비서관도 지내는 등 나름 미래가 유망한 중간 관리자였다.
하지만 고질적인 장시간 근무와 인력 부족 와중에 국민을 위한 봉사와는 동떨어진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현실에 좌절하다가 사직을 결심했다.
그는 공직 사회가 인재난을 겪는 상황에 관해 "가스미가세키는 이미 붕괴 입구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한국에서는 너도나도 공무원이 되려고 해서 문제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공직 사회가 인재 부족에 시달리는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센쇼가 요즘 젊은 공무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아주 바쁜 부서 초년생의 하루"에는 오전 7시에 업무를 시작해 익일 오전 3시 15분에 종료하는 살인적인 일정이 소개돼 있다.
우선 검토 중인 정책이 보도되는 바람에 장관(대신<大臣>)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할 참고 자료를 집에서 작성하는 것으로 초년 공무원의 하루가 시작된다.
결재를 받아 장관 비서관에게 보내고 출근하면 국장이 국회의원에게 보낼 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자료를 만들고 나면 국회 심의 자료 작성, 국회의원이 요청한 지역구 행사 인사말 작성, 과장이 국회의원 브리핑에서 사용할 자료 수정, 지방자치단체 문의 대응, 의원실 면담 관련 연락 등의 일이 밀려든다.
오후에는 과장 지시로 자료를 수정하고 앞서 만든 국회의원 인사말에 관해 상사에게 설명한 후 수정 지시를 받는다.
이후 심의 자료 수정을 과장과 다시 논의한 후 자료를 들고 의원 사무소를 방문해 설명한다.
오후 4시 무렵 청사로 복귀하면 오전에 만든 국회의원용 자료에 관한 내부 검토 회의가 열린다. 이를 토대로 수정해 과장의 승인을 받고 국회의원 질의서에 대한 답변서를 작성한다.
저녁에는 다음날 예정된 장관 기자회견용 답변 참고자료를 만들고, 국회 질의서 답변에 대한 상사의 승인을 받는다.
국회의원 인사말을 겨우 완성해 의원실에 보내고 나면 장관의 회견 자료를 수정해달라는 비서관의 연락이 온다.
자료를 수정해 대변인실에 전달하고 오후 10시를 넘겨 청사 내 편의점에서 산 음식으로 늦은 저녁 식사를 대신한다.
이후에도 일은 끊이지 않는다. 국회 질의서에 대한 담당 부서의 검토를 끝내고 이를 참고 자료와 함께 내각 법제국에 발송해야 하루 업무가 종료된다.
업무 자체가 많기도 하지만 반복되는 회의, 내부 검토 및 수정, 행정의 본질과 동떨어진 잡무 등이 비효율을 키우는 양상이다.
센쇼는 "장시간 노동 그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더 본질적인 괴로움은 사회에 도움이 되고 이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할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관료가 됐는데 그런 실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타성으로 하던 비효율적인 방식을 바꿔서 관료가 일하는 시간의 많은 부분을 국민을 위한 정책 검토나 집행에 쓰게 하는 환경 만들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도 사직하는 젊은 공무원도 늘고 있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국가공무원제도 담당상은 가스미가세키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진단하고서 "인재가 앞으로도 가스미가세키에 오도록 제대로 노력하고 싶다"는 의견을 최근 표명했다.
추진력 좋기로 정평이 난 고노지만 해묵은 조직 체계와 문화를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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