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프랑스 대대 지휘한 몽클라르 장군 아들 인터뷰
"어려울 때 마스크 지원해준 한국 정부에 고마움 잊지 못해"
(파리=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저를 이어서 제 딸(29)과 아들(20)이 최근 한국전쟁 참전협회에 가입했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한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명맥이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군 계급을 중장에서 중령으로 4단계나 자진 강등해가며 6·25 전쟁에 참전한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 롤랑 몽클라르(71) 씨의 느릿한 말투 속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
몽클라르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미 제2사단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이끌며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이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195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이 전투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유엔군이 승전고를 울린 최초의 전투로, 이후 38선 회복의 밑거름이 됐다.
한국전쟁 10대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지평리 전투 70주년을 며칠 앞둔 지난 11일(현지시간) 롤랑 씨를 파리의 자택에서 만났다.
그간 몽클라르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활동은 주로 롤랑 씨의 연년생 남매 파비엔 씨가 해왔으나 2017년 12월 세상을 떠나면서 롤랑 씨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몽클라르 장군이 전쟁을 치르러 한국으로 떠났을 때 롤랑 씨는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태어난 지 1년밖에 안 된 아기였고, 동생 파비엔 씨는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다.
롤랑 씨는 "그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무런 기억이 없다"며 "청소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자유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고 말했다.
그가 14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 중 어떤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자 주저 없이 아버지가 1950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자신에게 보내준 편지를 읽어줬다.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내가 너를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 한국의 길거리에는 너와 같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어린 소년들이 아주 많단다. (…) 너와 같은 어린 소년들이 길에서, 물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왔단다."
아버지가 보내준 편지에 담긴 내용을 대부분 읽어주고 나서 그는 "자유와 평화를 향한 그의 의지와 열망이 녹아있는 이 편지는 프랑스에서도 청년들에게 영감을 주는 편지로 아주 유명하다"고 설명했다.
롤랑 씨는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한국은 굉장한 빈국이었는데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뒀다"며 "전 세계가 이를 찬미하고 있고 나 또한 한국의 성장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전 세계가 고통받는 요즘 한국전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을 잊지 않고 마스크를 지원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
프랑스에서 마스크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지난해 5월 지원받았던 마스크를 다른 가족들과 나눠서 쓸 수 있었다며 "어려울 때 도와준 한국 정부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한국전쟁 참전 프랑스 참전용사 및 친구들 협회'에 가입한 참전용사 47명과 그 유족 등 180여명에게 KF94 방역 마스크를 전달했다.
금융업계에 오래 몸담았다가 은퇴한 롤랑 씨도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따라 군 장교를 꿈꿨던 때가 있었지만, 아버지가 1964년 타계하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꿈을 접었다고 전했다.
못다 이룬 롤랑 씨의 꿈을 잇겠다는 것인지 그의 아들이 군인이 되고 싶어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처제들은 아들이 저를 기쁘게 하려고 군인의 길을 선택하려는 게 아닌가 이야기하는데, 사실 프랑스에서 군인은 단순한 직종의 하나가 아니라 소명 의식이 있어야만 수행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청년들이 한 번쯤은 꿈꿔보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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