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배터리 경쟁 불꽃…문대통령 "경쟁하되 협업해야"
(서울=연합뉴스) 김종현 기자 =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096770]이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를 놓고 벌인 700여일간의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싸움이 끝까지 갈 경우 최후 승자는 LG도 SK도 아니다. 두 기업이 박터지게 싸우는 사이 중국 배터리의 시장 지배력은 강화되고, 소송전에 물 쓰듯 뿌린 두 회사의 '쩐'은 미국의 로비스트와 변호사의 배만 불릴 것이다.
돈도, 고객도, 기업 이미지도 잃어 상처만 남을 바보스러운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있을까.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배터리 싸움을 여기서 멈추자고 막후에서 전격 합의한 이유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페이스북에 "최근 세계 경제 환경은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공급망 안정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며 "국내의 산업생태계 구성원들이 경쟁하면서 동시에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협업하는 것이 국익과 개별 회사의 장기적 이익에 모두 부합한다"고 했다.
◇ LG는 '2조원과 명분', SK는 '실리'를 얻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11일 이사회를 열고 양측의 합의안을 승인했다.
합의안은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에 배상금으로 현금 1조원과 로열티 1조원 등 모두 2조원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애초 LG는 3조원대, SK는 1조원을 주장했으나 중간선인 2조원으로 결정됐다. 양사가 서로를 겨냥해 진행 중인 모든 분쟁과 소송도 종료하기로 했다.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에 지식재산권 분쟁으로는 사상 최대인 2조원이라는 천문학적 돈을 지불하기로 한 것은 지난 2월 영업비밀 침해와 관련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판결에 승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ITC가 내렸던 SK이노베이션에 대한 10년 수입금지 조치는 해제됐고,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SK이노베이션으로서는 배터리 사업의 존폐가 걸린 미국에서의 사업 불투명성이 제거되고, 폭스바겐과 포드 등 고객사에 배터리 공급 차질을 빚을 경우 예상되는 손해배상은 물론 조지아주 공장 건설 중단에 따른 매몰 비용과 설비 이전 부담에서도 벗어났다.
LG에너지솔루션은 2조원이라는 막대한 합의금을 챙겼다. 자사가 "옳았다"는 명분도 얻었다. 그렇지 않아도 투자 자금 조달을 위해 연내 상장을 추진하는 LG에너지솔루션으로서는 엄청난 '실탄'을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긴 분쟁으로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이미 깊은 내상을 입었다. 양사는 지난 2년간의 소송과 로비로 수천억원을 날린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소송이 장기화할 경우 1조원 이상의 출혈이 예상된다는 관측도 있었다. 자칫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양사의 싸움은 세계 2위 전기차 업체인 독일의 폭스바겐의 지난달 중순 배터리 내재화 선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폭스바겐의 배터리 내재화 발표가 있었던 1주일간 LG화학[051910](LG에너지솔루션의 모회사)과 SK이노베이션의 시가총액은 13조원이 증발했다.
양사가 긴 분쟁 과정에서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 배터리 공급체인 불안감을 일으키면서 신뢰성이 추락하고 중국 배터리의 공세적 시장 확대를 허용한 것은 큰 손실이다.
이번 합의에는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와 우리 정부의 압력과 중재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로서는 양사의 싸움으로 자국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에 구멍이 뚫리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 중국 업체에 어부지리를 주는 것을 용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세균 총리를 비롯한 우리 정부 인사들 역시 배터리 분쟁 장기화에 따른 심각한 국익 훼손을 우려했다.
양국 정부의 합의 종용은 그렇지 않아도 '치킨 게임'을 접기 위한 명분을 찾고 있던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에 돗자리를 깔아준 것일 수도 있다.
이를 두고 워싱턴포스트(WP)는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으면서 일자리와 미국 내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 구축을 원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승리"라고 추켜세웠고,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노동자와 자동차 산업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 중국은 치고 나가는데…갈길 급한 K 배터리
세계 배터리 시장은 최대 수요처인 전기차 시장이 이제 태동기여서 반도체 시장과 같은 확실한 선두업체나 기술의 초격차가 없다. 기존 배터리 업체는 물론 자동차 업체들도 다투어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의 CATL이 24%의 점유율로 4년째 1위를 지켰으나 LG에너지솔루션이 23.5%로 바짝 추격했다. 일본 파나소닉이 18.5%로 3위, BYD(중국)가 6.7%로 4위, 삼성SDI[006400]와 SK이노베이션이 각각 5.8%와 5.4%로 5위와 6위를 달렸다.
국가별로 보면 한국과 중국이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올해 들어 1∼2월을 놓고 보면 CATL의 점유율은 31.7%로 치솟았지만 LG에너지솔루션은 19.2%로 떨어졌다.
여기에 폭스바겐은 2030년까지 유럽에 6곳의 배터리 공장을 건설해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를 자체 공급하겠다고 했다.
또 2023년부터는 현재의 파우치형 배터리 대신 각형 배터리를 탑재해 2030년까지 비중을 80%로 높이기로 했다. 협력 파트너로는 각형 배터리를 생산하는 중국의 CATL을 선택했다.
이는 파우치형 배터리를 주로 생산해 지금까지 폭스바겐에 공급해온 LG 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등 우리나라 배터리업체에는 큰 악재다. 글로벌 전기차 선두기업인 테슬라는 일찌감치 배터리 내재화를 선언했고, 도요타와 포드 GM 등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도 배터리 자체 생산을 서두르고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휴대폰 업체인 애플까지 자체 설계 배터리를 적용한 전기차 개발에 나선 상태다. 특히 일본의 도요타는 꿈의 배터리라고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탑재 전기차 시험 차량을 올해 공개하겠다고 한 상태여서 배터리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이 불을 뿜고 있다.
기술표준과 시장 경쟁이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카오스의 격류 속에서 SK이노베이션이나 LG에너지솔루션이 '우물 안' 싸움으로 허송세월할 틈이 없다.
손승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글로벌 배터리 경쟁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는 마당에 LG와 SK의 분쟁 장기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K 배터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양사는 선의의 경쟁은 하되 서로 협력해야 하며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양사의 분쟁은 결국 모두의 패배로 중국과 일본 등에 어부지리를 주는 것이다"라면서 "이번 합의를 K 배터리의 위상과 경쟁력을 더욱 높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kim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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