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테마 무착륙 관광비행 체험기
(인천=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여행이 우리를 떠나버린 시대, 무착륙 관광 비행이 '유사 해외여행'으로 주목받고 있다.
넓은 실내공간 덕분에 '하늘 위의 호텔'이라고 불렸지만, 해외여행 중단으로 애물단지가 됐던 A380도 무착륙 관광 비행 덕분에 다시 활용도가 높아졌다.
덕분에 면세품 판매도 활기를 띠고 있다.
◇ '우리를 위로하던 여행은 잘 있을까'
어느 여행사의 감성을 호소하는 광고 문구처럼 해외여행이 자못 궁금해졌다.
팬데믹이 일상을 덮친 이후 여행은 우리의 삶에서 멀어졌다. 물론 국내 여행은 갈 수 있지만,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해외여행은 1년 넘게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스페인관광청과 아시아나항공이 스페인을 테마로 한 무착륙 관광 비행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스페인관광청과 아시아나는 4월 한 달 3차례 떠나는 '아시아나가 우리를 스페인으로 데려다주겠지'라는 제목의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상품을 판매했다.
실제로 스페인에 갈 수는 없는 만큼 해외여행 기분을 내면서 일본 상공을 비행하고 돌아오는 2시간가량의 여정이다.
관광 비행 당일 인천국제공항까지는 공항고속도로를 통해 직접 운전을 하고 갔다. 공항 장기 주차장에 도착해 보니 주차공간은 거의 비어있다시피 했다.
아시아나항공 카운터에서 여권을 제시하니 탑승권과 함께 '인천공항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이라는 문구가 든 명찰을 하나 준다.
휴대품 검사 등을 포함해 정상적인 출국 수속을 밟았다. 수속을 밟은 뒤 보안구역 내부의 아시아나 라운지를 찾았다.
마침내 1년 넘게 잠자고 있던 PP(Priority Pass)카드를 쓸 기회가 왔다. PP카드는 전 세계 공항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카드로, 비싼 연회비를 내야 하는 함정이 있다.
◇ 스페인 여행 분위기 내는 무착륙 관광
아시아나 라운지에 들어가니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라운지에 잠시 앉아만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침 일찍 나온 탓에 먹지 못한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했다.
라운지에는 혼자 여행을 떠난 70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스페인 테마 비행 소식을 듣고 사위에게 부탁해 여행을 왔다고 한다.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편도 두고 혼자 관광비행에 참여했는데 무척이나 즐겁고 설레는 표정이다.
잠시 라운지에서 쉬고 난 뒤 서둘러 출국장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스페인 민속무용인 플라멩코 공연이 열렸다.
신나는 기타와 드럼 소리와 함께 플라멩코 공연이 30여 분간 이어졌다. 조용하던 공항이 플라멩코 리듬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동영상과 사진을 찍는 승객들도 많았다.
공연이 끝나자 승객들은 줄지어 비행기에 올랐다. 탑승객 전원에게 록시땅 어메니티 세트가 선물로 증정됐다. 스페인관광청은 선착순으로 로고백, 스카프, 수첩 등 스페인 기념품도 나눠줬다.
관광비행에 사용되는 기종은 A380으로, 실제로 타보니 웅장했다. 20년 전 더블덱이 있던 747에 탑승했던 기억이 났다. 그 이후로 2층 비행기를 탄 것은 처음이다.
모두 490여개의 좌석이 있는 이 여객기에는 거리두기 차원에서 200명 채 안 되는 승객이 탔다.
A380은 팬데믹 이후 취항지가 없어져 애물단지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무착륙 관광 덕분에 다시 날 수 있게 됐다.
아시아나의 경우 지난해 가을부터 진행한 무착륙 관광 비행에는 오로지 A380 기종만을 활용해왔다.
비행기 스크린의 운항 정보에는 출발지와 목적지가 둘 다 인천으로 나왔다. 진귀한 장면이었다.
이륙에 앞서 스페인관광청 이은진 소장이 직접 기내 방송을 통해 인사말을 했다.
이 소장은 "이번 여행은 좀 특별하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여행을 찾는 여정이기 때문"이라면서 "조만간 우리가 다시 여행하는 그 날, 저는 스페인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스페인관광청의 슬로건이었다.
"¡Sonrie! Estas en Espana"(미소를 지으세요. 당신은 이미 스페인에 있으니까요!)
비행기는 곧 이륙했다. 오랜만에 기내 영화를 보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벌써 대마도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아차 싶어 밑을 봤는데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마도 상공인가 싶었는데 비행기는 순식간에 후쿠오카 쪽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후쿠오카 앞 이키섬에서 오른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곧 제주도 상공이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한라산 백록담
제주도 상공에 들어서니 왼쪽 창문으로 한라산 백록담이 보였다. 기장이 한라산 백록담을 볼 수 있도록 고도를 낮춰 비행한다는 안내방송을 했다.
승객들은 눈에 잡힐 듯 다가온 백록담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대형 여객기가 이처럼 고도를 낮춰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비행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왼쪽 승객들은 비행기가 여러 번 선회한 덕분에 여러 각도에서 한라산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참으로 진기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술렁거리며 백록담 사진을 찍기 바빴다.
오른쪽으로도 선회한다고 했지만, 관제본부와 제대로 협조가 되지 않았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비행기는 제주도 상공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오른쪽 창가에 앉은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비행기가 만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 오른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왼쪽 좌석이 비어있는 경우 자리를 옮겨 백록담을 구경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일본 상공을 비행한다는 것도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남들이 볼 수 없는 각도에서 한라산 백록담을 봤다는 것은 엄청난 횡재를 한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기내 면세 쇼핑을 하는 승객들이 많았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무착륙 관광비행에서 예상외로 꽤 많은 매출이 일어나 깜짝 놀란 적이 많다고 했다. 입국 시 두 손에 잔뜩 면세품을 사 들고 내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곧 착륙이었다. 너무 짧아서 아쉬웠다. 착륙 직전 아시아나항공 기장의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우리가 여행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손님 여러분을 이 비행기에 모시고 함께 여행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안내방송이 감성을 자극한 것은 우리를 떠난 여행에 대한 그리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 이 모든 것이 간절했기 때문인 것 같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polpo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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