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방기·공감력 부족…거래 제도화 미룰 수 없어"
(서울=연합뉴스) 김종현 기자 =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관료 인생 중 요즘 가장 난감한 나날을 보낼 것 같다.
최근의 가상화폐 폭락에 분노한 2030 코인 민심은 강하게 결집해 은 위원장의 자진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은 위원장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피 같은 투자금을 날린 울화를 달래기 위한 '희생양' 찾기일까, 아니면 이유 있는 분노일까.
정부는 이번에도 가상화폐 시장의 롤러코스터를 '투기꾼들의 집단 광기'쯤으로 치부하면서 책임에서 발을 빼려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넘어가긴 힘들어졌다.
시장 참여자의 수나 거래 규모가 거대하게 불어나면서 단순한 제도권 밖의 시장 문제가 아닌 시급한 대책을 필요로 하는 경제 사회적 현안으로 커져 버렸기 때문이다.
◇ 은성수에게 쏠린 코인 민심의 분노
지난 23일 청와대 국민소통 게시판에 올라온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자진사퇴를 촉구합니다'라는 청원에는 25일까지 12만명 가까이
동의했다.
상당히 빠른 속도다. 청와대 답변 기준인 청원 동의 20만명 돌파는 시간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은 위원장이 뭐를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그는 지난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은 위원장은 가상화폐를 '내재가치가 없는, 인정할 수 없는 화폐'로 규정했고, '가상자산 투자자들을 정부가 보호할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은 위원장의 이런 발언은 기존의 정부 입장과 같은 것으로 새삼스럽지 않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위험 자산 투자는 자기 책임이다.
특히 코인 같은 가상자산은 정부가 '화폐'로 인정하지 않는 데다 자산의 성격이 모호하고, 제도권 밖에 있어 정부가 책임질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은 위원장이 "잘못된 길로 가면 어른들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고 했는데 나이 든 투자자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으나 비이성적 과열이 지배하는 시장에 제동을 걸고 위험을 경고하는 것은 금융 정책 관료의 당연한 책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연준(Fed)의 제롬 파월 의장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 유럽중앙은행(ECB)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물론 한국은행의 이주열 총재까지 각국 중앙은행장이나 정부 금융 관료들은 거의 모두 코인 투자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9월까지 등록이 안 되면 200여개의 가상화폐거래소가 다 폐쇄될 수 있다"고 한 말은 너무 과도했다는 비판이 많다.
정부는 개정 특정금융정보법을 지난달 25일 시행하면서 가상화폐거래소들에 9월까지 은행으로부터 반드시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입출금계좌를 받아 신고해야만 영업을 할 수 있다고 공지한 상태여서 은 위원장의 발언 자체가 근거 없다고는 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빗썸, 업비트, 코인원, 코빗 등 전체 거래의 90%를 맡은 거래소들은 현재 은행들과 실명계좌를 트고 영업하고 있어 폐업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를 두고 시장 일각에서는 지난 2018년 1월 박상기 당시 법무부 장관이 "가상화폐거래소 폐지 법안을 만들겠다"고 한 발언으로 시장이 폭락했던 '악몽'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책 당국자는 언동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면서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거래소를 다 폐쇄할 수 있다는 식의 강한 발언은 설사 틀린 얘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시장에 충격이 되고 코인에 물린 젊은이들을 불안으로 모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책임방기·공감 능력 부족 문제"
은 위원장의 책임 회피식 발언도 문제가 됐다. 코인류를 화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장 자체를 방치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내 코인 거래소는 200여개, 2월 기준 실명 인증 계좌만 250만개에 달하며, 하루 거래량이 20조원에 가깝다. 영끌 빚투를 하는 2030 투자자가 60%이며, 많은 젊은이가 이 시장에 마약 하듯 빨려들어 '코인 폐인'이 되고 있다.
이 정도면 제도권 안이냐 밖이냐는 무의미하다. 은 위원장은 "제도권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했지만 회피한다고 해서 정부가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3년 전에도 그랬듯 주기적으로 코인 시장 문제가 되풀이되는데도 겨우 자금세탁 방지를 명목으로 특정금융정보법만 달랑 개정한 것은 정부와 정치권의 직무유기라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우석진 교수는 "정부가 가상화폐를 '화폐'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제적 흐름에 발맞춰 최소한 무형자산으로라도 인정해 시장의 틀과 상품 거래의 규율을 세워 시장이 혼탁하지 않도록 제도화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블록체인학회 회장인 박수용 서강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암호화폐 시장의 확대와 코인의 다양화는 빠르게 진행되는 디지털 혁명 속에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 만큼 증권거래소처럼 시장을 양성화하고 제도적 틀을 갖춰 지속가능성 있는 암호화폐만이 상장되고 거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작금의 코인 열풍을 시장의 문제로 인식하든, 사회문제로 인식하든 정부가 발을 뺄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
깡패도 자릿세를 받으면 영업을 보호해 주는데 정부가 투자자 보호엔 발을 빼면서 세금을 내라는 게 말이 되느냐는 네티즌들의 항변에 정부가 할 말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관료로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젊은층의 투자 행태가 왜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사회경제적 통찰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비전이 아쉽다는 지적이다.
은 위원장의 사퇴를 청원한 '30대 평범한 직장인'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 하나 가질 수 없는 현실'과 '청년 실업 대란'의 책임이 기성세대에 있지 않으냐고 따졌다. 앞이 막힌 청년세대의 절규로 읽힌다.
산업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박수용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 기반기술인 블록체인과 함께 코인 관련 사업이 활성화하도록 해야한다"면서 "글로벌 코인 산업은 꾸준히 성장세를 지속하는데 우리나라는 규제에 묶여 외국 기업 배만 불리고 있다"고 했다.
kim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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