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회원국 만장일치 동의 필요…2003년 HIV 등 복제약 허용 전례
백신 개발사 기술이전 뒤따라야 효과…업계는 면제 반대하며 백신 배포 확대 주장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미국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의 지식재산권(지재권) 면제 지지 입장을 밝힘에 따라 관련 논의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지재권 면제와 더불어 기술이전까지 이뤄지면 백신 생산 역량을 갖춘 국가들이 복제 백신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 전 세계적인 백신 공급난을 해결할 대안이 될 수 있다.
6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작년 10월부터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도로 백신 지재권 면제 주장이 나왔지만 많은 다른 선진국은 이에 반대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일 지재권 면제를 지지한다고 말한 데 이어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코로나19 대유행의 특별한 상황은 특별한 조치를 요구한다"며 같은 입장을 밝혔다.
미국이 화이자, 모더나, 존슨앤드존슨 계열사 얀센 등 3종의 백신을 개발해놓고도 자국민 우선접종 원칙을 내세워 상당수 물량을 사실상 독차지함으로써 전 세계 공급난을 가중한다는 비판론이 커지는 와중에 나온 결정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5일 "지재권 개방에 전적으로 찬성한다"고 호응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물론 코로나19 백신 공동 구매·배분을 위한 국제 프로젝트인 코백스를 이끄는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역시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AP는 지재권 면제에 관한 더 많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이 남았다며 백신의 대량 생산과 배포가 실현되려면 여러 관문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먼저 세계무역기구(WTO) 164개 회원국이 지재권 면제에 만장일치 동의해야 한다.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안 된다.
AP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미국의 지재권 면제 제안을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찬성 여부에 대해 분명히 답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지재권 면제 합의가 이뤄진다고 해서 곧바로 다른 나라의 백신 생산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재권 면제는 복제약 생산을 허용하겠다는 의미일 뿐, 백신 개발사가 기술과 설비, 노하우를 모두 공개하거나 알려주겠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화이자와 아스트라제네카 등 주요 제약사들이 속한 국제제약협회연맹(IFPMA)은 성명을 내고 미 행정부 입장에 "실망했다"면서 백신 지재권 면제는 "복잡한 문제의 단순하지만 틀린 해답"이라고 반발했다.
지재권이 면제되더라도 아프리카와 같은 곳의 제약업체들은 백신을 제조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만큼 백신 제조량을 늘려 배포를 확대하는 것이 더 빠른 해법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또 백신 생산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지재권 완화가 곧 생산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공급망의 병목현상을 줄이고 백신에 들어가는 원재료의 희소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도 지재권 면제는 개발도상국으로의 기술 이전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업계는 지재권 면제가 제약업체들의 혁신 유인을 줄여 장기적으로 득보다 해가 더 클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다른 정부가 (특허를) 훔치는 것을 백악관이 돕는다면 누가 미래의 치료제에 투자하겠느냐"며 '바이든의 백신 특허 도둑질'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기도 했다.
AP에 따르면 국제사회는 과거에도 지재권을 면제한 전례가 있다. WTO 회원국들은 2003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특허권 면제에 동의하고 빈국이 복제약 수입을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jbr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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