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생활전선 곳곳에서 당황하기 일쑤
부패가 전기 공급에 영향…'유비무환' 생활 자세 필요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김성진 특파원 = "핸드폰, 노트북, 태블릿, 라디오는 전기를 이용할 수 있으면 항상 최대한 충전해 놓아야 한다."
"자동차는 항상 연료탱크에 기름이 있도록 해야 한다. 전기가 나가면 대부분의 주유소가 연료 펌프를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일간 프리토리아 뉴스에 나온 '로드 셰딩(load shedding·순환 정전)에서 살아남기 가이드'라는 제목의 기사에 나온 몇 가지 팁 가운데 일부다.
신문은 국영 전력회사 에스콤이 고객들에게 앞으로 닷새간 로드 셰딩을 예상할 수 있다고 발표하자 생활 면에 이 같은 기사를 실었다. 남아공은 요즘이 겨울철이다.
로드 셰딩은 기본적으로 전력 공급 부족 상황에서 발전소의 과부하로 전력망의 가동이 중단되지 않도록 지역별로 돌아가며 정전해 부하를 덜어준다는, 다소 순화된 뜻으로 남아공에서 쓰는 용어다.
쉽게 말하면 전국적으로 곳에 따라 시간대별로 정전된다고 보면 된다.
이에 따라 남아공에선 전기 공급이 때로 중단된 세상에서 나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 나라에 와서 살면서 익히는 생활의 지혜라면 지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아공은 일찍이 2005년부터 로드 셰딩이 16년째 지속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흔히 아프리카 오지라고 하면 '전기도 잘 안 들어오고'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점에선 대륙에서 가장 선진화한 경제라는 남아공에서도 '아프리카에 온 게 맞긴 맞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한국살이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배운다.
한국에서는 태풍을 포함한 자연재해로 인해 끊기는 것이 아니면 전기 공급이 중단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다. 간헐적으로 전기요금 인상 여부가 뉴스의 단골 메뉴다.
그러나 남아공은 시시때때로 전기가 끊기지 않는 세상을 언제나 맞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남아공이 전기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남아공 에스콤은 1923년 설립돼 내후년이면 100년의 역사를 맞게 된다.
문제는 노후한 석탄 발전설비 등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안 이뤄진 데다 제이콥 주마 전 대통령(임기 2009∼2018년) 당시 인도계 재벌 굽타 가문 형제들의 국정 농단 때문에 에스콤 등 국유기업이 부패에 물들어 현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 대체적인 진단이다.
로드 셰딩은 나라의 부패 문제가 전기 문제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전력공급난 때문에 남아공 경제가 중국, 인도처럼 개발도상국다운 고도성장을 예외적으로 못 누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장을 돌리려고 해도 전기가 없는데 어떤 수로 돌린다는 말이겠는가.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이 닥치기 전부터 침체에 들어간 남아공 경제는 지난 1년 3개월 동안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록다운(봉쇄령)까지 내려져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여기에 고질적인 로드 셰딩이 그럭저럭 버텨온 경제의 회생 발목을 잡자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지난 10일 회사들이 면허 없이 자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용량을 1MW(메가와트)에서 100MW로 깜짝 상향하는 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남아공 전력공급의 95%를 감당하는 에스콤이 제 기능을 못 하니 기업들이 알아서들 발전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준 것이다.
다시 신문에서 제시한 로드 셰딩 생존법으로 돌아가 보자.
"일부 현찰을 (비상금 조로) 지참하고 있어라. 현금자동입출금기(ATM)는 전기 없이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전기가 나가면 통신, 수송, 현금 등 생활 수단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일깨운다.
먹는 것도 문제다.
전기가 막상 나가고 보니 밥을 하려고 해도 가스 불을 켤 수도 없었다. 전기로 타닥타닥 튀겨 가스 불에 점화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지난 9일 남아공의 경제 중심지 요하네스버그 호튼에서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만년을 보낸 저택을 방문했을 때 정문 도어록이 안 열려 우회해야 했다.
인근 만델라 기념재단조차 전기가 안 들어와 만델라 집무실을 못 보여줄 뻔했으나 다행히 비상 발전기가 있어서 가능했다. 만델라 이후 남아공이 직면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작금의 팬데믹 상황에서 코로나19 백신을 냉장 보관하거나 화이자의 경우 초저온 설비에 저장해야 하는데 전기가 가끔 끊어지는 것도 경우에 따라선 백신 변질을 야기할 수 있다.
도로에서 운전할 때도 전기가 안 들어오면 무엇보다 신호등이 제대로 작동 안 된다.
그래서 사거리에선 먼저 온 순서대로 돌아가며 차례로 운행해야 한다.
남아공 운전자들은 이를 비교적 질서 있게 잘한다.
로드 셰딩에서도 나름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밖에 여러 로드 셰딩 생존 팁들이 있지만, 핵심을 요약하자면 '전기를 아끼라, 그리고 유비무환의 자세로 살아라'이다.
sung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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