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몰로토프-리벤트로프 가스관'?…파이프라인의 정치학

입력 2021-07-30 07:07  

[특파원 시선] '몰로토프-리벤트로프 가스관'?…파이프라인의 정치학
러-독 연결 '노르트 스트림-2' 가스관 미국 승인에 비난·환영 입장 대치
美 "99% 완공돼 제재로 못 막아"…우크라 "가스 얻으려 우크라 팔아넘겨"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지난 2009년 1월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13일 동안이나 중단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가스 대란이 벌어졌다.
러시아가 친서방 노선을 걷는 옛 소련 국가 우크라이나와의 가스 공급가 협상에 실패하자 우크라이나 경유 유럽행 가스관을 아예 잠가버리면서 벌어진 일이다.
일부 유럽 국가 주민들은 가스난방이 끊기면서 영하의 날씨에 추위에 떨어야 했고, 일부 국가에선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되는 등 대혼란이 빚어졌다.
전체 가스 수요의 약 3분의 1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유럽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중재하려 골머리를 앓았다.
이에 앞서 2006년에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역시 '오렌지 혁명'으로 반(反)러시아 친서방 노선을 채택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갈등을 빚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다.
지난주 러-우크라 분쟁이 단초가 된 가스관 논란이 또 한번 터졌다.
미국과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우회해 러시아와 독일을 직접 연결하는 '노르트 스트림-2' 가스관 완공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련국들에서 파문이 일었다.
그동안 노르트 스트림-2 건설에 강하게 반대해오던 미국이 전격적으로 태도를 바꿔 가스관을 승인하면서 관련국들 사이에서 환영과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기본적으로 러시아-독일 양국의 사업이지만 미국이 계속 사업에 반대하며 제재 정책을 쓰면 가스관이 완공되더라도 가동과 운영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99%의 공정율을 보이는 가스관 건설을 제재로 중단시킬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승인 배경을 설명했다.

현실을 무시한 채 러시아 견제를 위해 계속 가스관 건설을 반대할 경우 유럽의 주요 동맹국인 독일과의 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어 국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도 보탰다.
가스관 건설이 정치와 무관한 순수하게 경제적인 프로젝트임을 강조해온 독일 정부는 당연히 미국의 승인을 환영했다.
미-독 양국은 노르트 스트림-2 건설로 직접적 피해를 볼 우크라이나를 달래기 위해 러시아가 가스관을 정치적 목적에 사용할 경우 즉각 대응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런데도 가스관 건설에 완강하게 반대해온 우크라이나,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불화를 이어온 폴란드는 강하게 반발했다.
양국 외무장관은 미-독 합의와 관련한 공동성명을 내고 "우크라이나와 중부 유럽 전체에 추가적 정치·군사·에너지 위협을 야기했다"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쪽에선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오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결국 러시아와 노르트 스트림-2 건설을 강행하며 우크라이나를 팔아넘겼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일부 서방 전문가는 노르트 스트림-2 가스관을 제2차 세계대전에 앞선 독일과 러시아의 불가침 밀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에 빗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가스관'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러시아는 자국 북부에서 발트해 해저를 거쳐 독일로 연결되는 기존 '노르트 스트림' 가스관의 수송 용량을 확장하기 위한 노르트 스트림-2 가스관 건설 사업을 지난 2015년부터 독일과 함께 추진해 왔다.
현재 2개 라인인 노르트 스트림 가스관에 2개 라인을 추가해 연 550억㎥인 기존 가스관의 용량을 두 배로 늘리려는 것이다.
가스관 건설은 미국 측의 제재 경고로 2019년 12월 건설 공사를 하던 스위스 기업 '올시즈'(Allseas)가 공사를 포기하면서 1년 정도 중단됐었다.
그러다 러시아가 지난해 12월부터 자국 부설선을 투입해 자력으로 건설 공사를 재개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사업 주관사 측은 다음 달에 건설을 마무리하고 올해 안에 가동에 들어간다는 시간표를 제시했다.


노르트 스트림-2는 거대한 러시아의 유럽행 가스관 네트워크 가운데 가장 최근에 건설되는 것이다.
1960~80년대 옛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유럽으로 가는 대용량 파이프라인을 건설했다.
'브라트스트보'(Brotherhood)와 '소유스'(Soyuz) 등이 중심이 된 우크라이나 경유 가스관을 통해 지금까지 중부·서부·남부 유럽으로 가스를 공급해 오고 있다. 전체 가스관의 수송 용량은 1천억㎥가 넘는다.
러시아는 1997년 벨라루스와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연결되는 '야말-유럽' 파이프라인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2012년엔 '노르트 스트림' 가스관을 완공했다.
뒤이어 2019년엔 흑해 해저를 지나 터키로 연결되는 '터키 스트림' 가스관을 건설해, 이를 연장하는 파이프라인으로 남부와 남동부 유럽으로도 가스를 공급하려 하고 있다.
노르트 스트림과 노르트 스트림-2, 터키 스트림 등은 친서방 노선을 노골화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불화로 기존 우크라 경유 가스관이 불안정해지면서 대안으로 건설된 가스관들이다.
특히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속했던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 수준으로 악화했고, 우크라이나는 2015년부터 수십 년 동안 해오던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직수입을 아예 중단했다.
우크라이나는 대신 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 등의 유럽 국가들과 계약을 맺고 자국 경유 가스관을 통해 유럽으로 가는 러시아 가스를 중간에 미리 뽑아 쓰는 '가상 역수입' 방식을 고안해 냈다.
무리하게 비싼 값을 요구하는 러시아 직수입보다 이게 더 싸게 먹힌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빼가는 가스양에 따라 유럽으로 가는 가스 공급이 차질을 빚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이 같은 우크라이나와의 지속적인 분쟁이 러시아가 노르트 스트림과 터키 스트림에 이어 또 다른 우크라이나 우회 가스관인 노르트 스트림-2 건설을 강행한 이유가 됐다.
탈석탄·탈원전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독일도 상대적으로 값싼 러시아 천연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노르트 스트림-2 건설에 기대를 걸어왔다.


반면 미국과 일부 유럽 국가들은 유럽의 대러 가스 의존도가 더 높아져 러시아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이라며 가스관 건설에 반대해 왔다.
새 가스관 등장으로 당장 피해를 보게 될 우크라이나의 반대는 격렬했다.
우크라이나는 러-독 직결 노르트 스트림-2 가스관이 가동되면 러시아가 그동안 유럽으로의 가스 수출을 위해 주로 이용해 오던 자국 경유 가스관을 완전히 폐쇄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가스경유 계약은 2024년이면 종료된다.
실제로 그렇게 되면 우크라이나는 가스 통과 수수료로 챙겨오던 연 20억~30억 달러의 수입을 잃게 된다. 러시아와 유럽에 대한 영향력 행사의 수단이 돼온 가스관 경유국 지위도 내려놓아야 한다.
러시아가 기존 가스관 유지에 대한 대가로 통과 수수료를 낮추거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가를 올리려 할 경우에도 저항할 수단이 마땅찮아 진다.
미-독 합의에 앞서 베를린을 방문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노르트 스트림-2 가스관 가동 이후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기존 유럽행 가스관의 정상적 운영을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이 보증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메르켈로부터 마땅한 답을 얻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에너지를 정치 무기로 이용하려는 러시아를 징벌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던 서방 진영이 각국의 실리 계산 앞에서 분열하는 가운데, 서방에 기대 러시아에 맞서려던 우크라이나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cjyou@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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