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실기 땐 낙오"…보유 현금 100조원, 투자·M&A 본격화 전망
(서울=연합뉴스) 김종현 기자 = 오는 13일 수형 생활에서 풀려나는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은 여전히 '사면초가'다.
아직 형의 효력이 살아있어 보호관찰 대상인데다 다른 사건 재판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해외 경쟁사들의 공세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일단 총수 부재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지만, 이 부회장은 무거운 족쇄를 매단 상태로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선봉에 나서야 하는 처지다.
◇ 가석방으로 풀려나도 경영 활동에 제약 많아
이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 파기 환송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지난 1월 18일 법정 구속된 지 약 7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나게 됐지만, 경영 최전선에 온전하게 복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형 집행 면제와 함께 유죄선고의 효력이 상실되는 사면과 달리 가석방은 형기만료 전 조건부 석방이어서 법무부의 보호관찰과 특별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른 취업제한, 거주지 제한 등을 받게 되며 해외 출국 때에는 법무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얻어야 한다.
여기에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등 노동·인권·시민단체와 여권 일각에서 여전히 이 부회장의 석방에 비판적이어서 경영 보폭을 넓히기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권 경선 후보인 박용진 의원은 이날 "통계를 살펴보니 지난 10년 동안 형기 80%를 안 채우고 가석방된 비율이 0.3%에 불과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가석방되면 0.1%에 해당할 것"이라며 "아닌 건 아니다"고 날을 세웠다.
이 부회장이 취업제한 대상인지에 대한 법령 해석을 놓고 법무부와 삼성 측의 견해가 엇갈리지만, 법무부는 이미 지난 2월 이 부회장이 취업제한 대상자라고 통보했다.
이 부회장은 다른 사법 리스크에도 줄줄이 엮여있다. 삼성물산[028260]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 계열사 부당 합병·회계 부정 혐의 1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고, 프로포폴 불법 투약 혐의로도 기소돼 있다. 어디서 다시 리스크가 불거질지 가늠하기 어렵다.
운신에 여러 제약을 받는 이 부회장은 진행 중인 재판 등에 대비하면서 표가 나지 않는 방식으로 삼성전자의 큰 투자 결정 등을 지휘할 가능성이 크다.
◇ TSMC·인텔 포위망에 갇힌 삼성…흔들리는 초격차
이 부회장을 기다리는 경영 환경은 한마디로 첩첩산중이다. 이 부회장이 수감돼 있는 동안 삼성전자를 둘러싼 글로벌 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쟁사들의 공세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시장 절반을 석권한 대만의 TSMC는 일찌감치 향후 3년간 1천억 달러(114조원)를 투자하기로 한 데 이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발 빠르게 올라타 미 애리조나주에 360억 달러를 들여 6개의 생산라인을 증설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정부의 K반도체 전략 발표 당시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에 17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모두 파운드리에 투입한다고 해도 연간 투자액은 17조원으로 TSMC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지난해 기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가 54%로 압도적 1위였고 2위인 삼성전자는 17%에 머물렀다.
반도체 종가인 인텔은 지난 3월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하며 200억달러(22조8천억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신규 반도체 공장 2개를 짓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최근엔 파운드리 세계 시장 점유율 3위인 글로벌파운드리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1위인 메모리 부문에서의 초격차에도 균열 조짐이 보인다. 미국의 마이크론은 삼성전자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176단 모바일용 낸드플래시 양산에 들어갔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하드웨어는 강하지만 소프트웨어 열세로 수익성에선 애플에 눌리고 있고, 물량에선 중국 샤오미에 밀릴 조짐이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은 2분기 판매량에서는 세계 1위를 지켰으나 6월 한 달만 놓고 보면 샤오미가 1위였다.
◇ 실탄 100조원, 미뤘던 투자·M&A 본격화하나
이 부회장이 풀려나면 삼성전자는 미뤘던 투자를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공급 부족, 미중 기술 패권 다툼으로 촉발된 글로벌 반도체 전쟁만 아니었다면 이 부회장의 석방은 쉽지 않았을 수 있다. 정부가 여권 지지층이나 시민단체의 반대를 뚫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로서는 국민과 정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그간 약속했던 국내외 투자를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실탄은 넉넉하다. 작년 말 현재 약 104조원의 현금을 갖고 있고, 올해 1분기와 2분기에도 각각 9조3천억원과 12조5천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삼성전자는 서병훈 IR담당 부사장은 지난달 29일 2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사업이 급변하고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핵심 역량을 보유한 기업에 대한 전략적인 M&A는 필요하다고 본다"며 "3년 내 의미 있는 인수합병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세계 주요 반도체업체들은 미래 생존 차원에서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으며 활발한 M&A에 나서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지난 2017년 2월 자동차 전장업체인 하만을 인수한 이후 4년여째 이렇다 할 M&A 실적이 없다.
미국 투자 결정도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당시 미국에 170억 달러를 들여 제2 파운드리 생산 공장을 짓겠다고 했으나 아직 부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전세계적으로 사상 유례없는 반도체 투자경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여기서 밀리면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런 측면에서 삼성전자도 과감한 투자 결정이 시급하다"고 했다.
한태희 성균관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삼성전자는 반도체뿐 아니라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TV, 통신장비 등에서 모두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종합전자회사로 독보적인 위상을 갖고 있지만 최근 스마트폰은 물론 반도체에서 경쟁사의 공세에 직면해 있다"면서 "신속한 경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CEO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라고 했다.
kim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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