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철수 공백으로 영향력 확대 시도…난민·극단주의자 유입은 우려
파키스탄·중·러·인, 자국 이해 따라 '탈레반 재집권' 득실 계산
(뉴델리=연합뉴스) 김영현 특파원 = 아프가니스탄의 대표적인 수식어 중 하나는 '제국의 무덤'이다.
과거 원나라부터 무굴 제국, 영국, 소련에 이어 미국까지 당대를 호령한 세계 초강대국이 아프간에서만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지만, 국토의 절반이 해발 1천m 이상인 산악국인데다 혹독한 겨울 날씨, 산재한 토착 세력의 저항 등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나라 가운데 한 곳이 아프간이었다.
이제 미국이 떠나고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20년만의 재집권을 눈앞에 두면서 아프간은 주변 각국에 '뜨거운 감자'가 됐다.
파키스탄,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은 미국의 공백을 이용해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은 욕심이 있지만 동시에 탈레반의 득세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유입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 탈레반 득세 즐기는 파키스탄…난민·극단주의 세력 유입은 경계
아프간과 2천670㎞ 길이의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은 최근 탈레반의 잇단 승리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왔다.
공식적으로는 평화적·정치적 해법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의 잔혹 행위를 적극적으로 비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파키스탄 군 당국은 탈레반의 승리는 필연적이며 일부는 탈레반을 응원하고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보도했다.
이런 분위기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탈레반의 탄생 배경 등을 살펴봐야 한다.
1994년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된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세력 기반이다.
그런데 이 파슈툰족은 아프간(1천500만명)과 파키스탄(4천300만명)에 걸쳐 산다.
이슬람 경전을 급진적으로 해석한 탈레반은 탄생 후 파키스탄의 군사 지원 속에 급속히 힘을 키워나갔다. 특히 파키스탄에 사는 파슈툰족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에서 양성한 '학생'을 탈레반 전사로 꾸준히 지원해왔다.
지금도 파슈툰족은 국경을 오가며 한 공동체처럼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내 탈레반 조직원 상당수는 파키스탄에 가족을 둔 채 전투에 임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파키스탄 정부 입장으로서는 껄끄러운 친미 성향의 아프간 정부보다는 자신들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탈레반이 재집권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상황인 셈이다.
다만, 파키스탄은 아프간 정부 붕괴 시 엄청난 수의 난민이 자국 내로 밀려들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는 지난달 말 미국 PBS 뉴스아워와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은 이미 300만명의 아프간 난민을 받아들였는데 내전이 길어질 경우 더 많은 난민이 밀려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파키스탄으로 더 유입될 가능성도 경계한다.
파키스탄은 이미 자국 내에서 정부 전복을 목표로 활동하는 파키스탄 탈레반(TTP), 발로치스탄주의 분리 독립을 원하는 무장 반군조직인 발로치스탄 해방군(BLA) 등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상황이다.
◇ 중국 입장도 미묘…탈레반의 테러 지원 가능성 차단 총력
아프간을 바라보는 중국의 시선도 복잡 미묘하다.
지난 20년간 미국의 아프간 무력 침공을 비난하다가 미국이 정작 철수를 선언하자 미국의 결정이 황당하다는 듯 또 다른 각도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아프간이 내전 등 혼란에 빠져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온상이 되는 상황을 매우 경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도를 살펴보면 아프간 북동부에 깃털처럼 동쪽으로 길게 뻗은 끝이 중국과 맞닿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프간과 인접한 중국 쪽 지역은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다. 아프간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가 인구의 다수이며 분리독립 움직임까지 있는 곳이다.
중국으로서는 탈레반이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의 중국 내 테러활동을 지원할 가능성에도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 셈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질 위기에 처한 중국은 지난달 말 자국 내 톈진(天津)으로 탈레반 대표단을 부르기도 했다.
당시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만난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주권 독립과 영토의 온전성을 존중하며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서 " 탈레반이 ETIM 등 모든 테러단체와 철저히 선을 긋고 지역의 안전과 발전 협력을 위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와 함께 중국은 미국의 공백을 이용해 아프간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지정학적 요충지인 아프간에서 미국 못지않은 지위를 갖게 된다면 향후 중동이나 중앙아시아로의 영향력을 크게 넓혀갈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아프간을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의 새로운 거점으로 구축할 수 있다는 복안에서다.
◇ 러시아도 '도미노식 위기 전파' 우려…인도는 탈레반 첫 인정
러시아도 아프간 동향에 매우 민감한 나라 중 하나다.
구소련 붕괴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1989년 아프간 철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라 러시아는 최근에도 아프간의 정치 지형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러시아는 그동안 미군 철수에 따른 아프가니스탄 정세 악화가 중앙아 지역에 혼란을 초래하고, 이것이 다시 자국 안보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도미노식 위기 전파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해 왔다.
접경국인 아프간의 정세 악화와 관련해 타지키스탄은 러시아 주도의 옛 소련권 안보협력체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에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타지키스탄 주둔 자국군 전력을 활용해 CSTO 동맹국들에 대한 어떠한 공세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탈레반의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은 이달 초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군은 탈레반의 도발을 무찌를 준비가 돼 있어야 하며 이것은 러시아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프간 상황 악화에 대비한 군사 훈련도 실시됐다.
러시아는 지난 5∼10일 병력 2천500명과 각종 군사 장비 500대를 투입,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아프간 국경 인근에서 대규모 연합 군사훈련을 벌였다
그간 탈레반을 무시했던 인도는 과거와 입장이 달라진 분위기다.
인도 정부는 그간 '앙숙'인 파키스탄과 밀접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탈레반을 공식 외교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아프간 정부만 상대하며 학교, 도로, 병원 등 현지 인프라에 30억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그런데 인도 정부는 지난 6월께부터 은밀하게 탈레반과 접촉하고 나섰다. 현지 언론은 "인도 외교 정책의 큰 변화"라고 분석했다.
인도가 탈레반과 접촉에 나선 이유 역시 현지에서 탈레반의 영향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스는 남아시아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프간 정세는 인도의 안보 등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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