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판이 영문판에 비해 편파적…의도적으로 속인 것 같다"
(뉴욕=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발언으로 기소된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의 무죄를 촉구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외국 교수 중 일부가 성명 내용을 완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진희 이스턴일리노이주립대 사학과 교수는 16일(현지시간) 탄원서 서명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부 서명자들이 뒤늦게 서명 취소를 희망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13일 한국과 일본, 미국 학자 수십명은 '류석춘 전 교수 기소를 우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와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편협한 증거'로 평가 절하하면서 한국 검찰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도널드 베이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 교수는 자신에게 보내진 영문 성명과 한글 성명의 뉘앙스가 다르다고 지적했다.
영문판 성명은 검찰이 '얼마 안 되는 증거' 혹은 '아슬아슬한 증거'(narrow set of evidence)에 근거해 류 전 교수를 기소했다고 표현했지만, 한글판에선 '편협한 증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베이커 교수는 "편협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좁다'라는 영어 단어보다 훨씬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며 "한글판 성명을 보면 류 전 교수 주장이 훨씬 객관적인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명을 할 때까지 한글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성명이 이처럼 편파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황당해했다.
그는 미국 교수들에 대한 서명 작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요시다 겐지'라는 일본인의 정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베이커 교수는 "요시다가 실존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나와 다른 학자들을 속인 것 같다"고 말했다.
베이커 교수에 따르면 요시다는 류 전 교수 관련 성명에 서명해 달라는 이메일을 교수들에게 보냈다. 자신이 한국에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고 소개한 요시다는 학교 내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성명의 목적이라고 교수들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성명에는 구미 학자들 외에도 일본과 한국 학자들도 참여했다.
일본에서는 최근 마크 램지어 하버드 법대 로스쿨 교수의 위안부 왜곡 논문을 옹호하는 책을 쓴 아리마 데츠오 와세다 교수를 비롯해 니시오카 츠토무 등 우익 인사들이 대거 서명에 참여했다. 미국에서는 과거 램지어 교수와 함께 '야쿠자의 대부분은 한국인'이라는 혐한 논문을 쓴 에릭 래즈무센 교수 등이 이름을 올렸다.
베이커 교수는 "성명서의 배후에 역사 왜곡세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위안부 피해 역사 부정과 관련된 것이라면 내 이름이 올라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태생으로 1970년대 초반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베이커 교수는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역사 왜곡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며 "5.18 민주화운동이든 일제의 만행이든,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이진희 교수는 "성명서의 배경과 주도 세력의 비윤리적 의도 및 절차와 관련한 사실관계를 알게 된 구미 동료 교수들은 경악하고 있다"면서 "역사 왜곡 세력이 사기에 가까운 방법으로 구미 학자들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k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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