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지친 몸 끌고 미국 도착한 아프간인…안도와 불안 교차

입력 2021-08-26 02:10   수정 2021-08-26 09:50

[르포] 지친 몸 끌고 미국 도착한 아프간인…안도와 불안 교차
워싱턴공항 입국 후 임시 수용시설 이동…"지옥 벗어났다" 다급했던 대피상황
일주일간 공항 생활후 미국행 '험로'…"미국은 왔지만 뭘 해야할지" 막막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정말 혼돈상태였습니다. 지옥을 벗어나 안심은 되지만 앞으로가 막막합니다."
미국 워싱턴DC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만난 한 20대 남성은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해 미국 땅을 밟은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을 탈출한 현지인이 속속 미국에 도착하고 있다. 덜레스 공항은 아프간전 때 미국에 협력한 현지인과 그 가족이 탈레반의 보복을 받지 않도록 미국으로 대피시키는 관문 중 하나다.
지난 14일부터 이날까지 사투 끝에 아프간을 탈출한 이들은 8만 명을 넘는다. 여기엔 미국과 동맹국 시민도 있지만 상당수는 아프간인이고, 이 중에서도 다수는 미국행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발을 짚거나, 다리를 절며 슬리퍼 차림으로 공항 문을 나서는 아프간인의 표정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대로 된 여행용 가방도 없이 보따리 하나를 싸든 채 입국하는 이들의 모습에선 분초를 다투며 긴박했던 대피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아프간을 탈출했다는 한 남성은 아프간의 카불 공항으로 가는 곳곳마다 탈레반이 검문소를 지키고 있어 내내 마음을 졸였다고 말했다. 독일의 환승지로 이동한 뒤 나흘을 지낸 뒤에야 겨우 이날 입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프간 출신으로 미국 영주권자인 35세 자웨이드 누르스타니는 공항에서 아내와 딸이 입국장 밖으로 나오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지난 6월 4년 만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프간을 방문했다가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아내와 딸은 카불 공항에서 사흘, 환승지인 카타르 공항에서 나흘을 기다린 끝에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루에 2~3시간도 채 못 잤다고 하소연하는 그의 표정에서 그간 마음고생이 절절히 묻어났다. 아버지와 형제 부부는 독일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힘겹게 미국 땅을 밟은 아프간인들은 공항밖에 대기하는 버스에 올라탄 뒤 인근의 덜레스 엑스포센터에 마련된 수용 시설에 임시로 옮겨진다.
이곳은 전시회 등 행사장 용도로 사용됐지만 대피민들의 체류를 위해 500개가량의 침대를 설치한 임시 수용시설로 지정됐다. 이들은 며칠 가량 이곳에 머물다 버지니아주 포트 리 등 미군 시설로 이동한다.

대피작업에 속도가 난 덕분인지 엑스포센터에는 아프간인을 실어나르는 전세버스가 쉴새 없이 드나들었다. 일부는 이곳에 잠시 머무르기 위해, 일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내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엑스포 주변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도록 검은 가림막이 처져 있었고, 당국 직원들도 각종 질문에 "언론 취재에 응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국무부에 문의하라"고 입을 닫았다.
어렵사리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눈 한 30대 남성은 자신이 전날 이곳에 도착했다면서 수용시설에는 현재 남녀노소 300명 정도가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이곳에 이틀간 지낸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들었다면서 어디로 가는지는 자신도 정확히 모른다고 말했다.
수용시설밖에서 만난 한 남성은 여자 형제가 전날 미국에 도착해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곧바로 집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제일 좋겠다면서도, 여의치 않으면 얼굴이라도 보고 싶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프간계 미국인이라면서 도움을 줄 일이 있을까 싶어 자원봉사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3명의 남녀 모습도 보였다.

미국에 도착한 아프간인의 표정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위험한 상황을 모면했다는 안도감이 묻어났지만 한편으론 나고 자란 고향을 등지고 타국에 정착해야 하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도 적지 않아 보였다.
덜레스공항에서 만난 한 남성은 "우선 가족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에 아프간을 떠나왔다"면서 "무슨 일을 할지, 어떤 직장을 가질지 들은 것도 없고 아무런 계획도 없어 막막하다"고 말했다.
이 남성은 "앞으로 미국에서 계속 살아야 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냐"면서 "아프간의 집에 돌아갈 날이 올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jbryo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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