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평가 저하…뒷받침 취재 없어 면책 안 된다" 판단
미군기지 반대 단체 '테러리스트'로 묘사…'친북파' 주장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주일 미군 기지 반대 운동과 관련해 재일 한국인 시민운동가를 비방한 사실상의 혐한 프로그램 제작사에 대해 일본 법원이 위자료 지급과 사과를 명령했다.
일본 시민단체 노리코에네트의 공동대표인 신숙옥(辛淑玉·62) 씨가 프로그램 제작업체인 'DHC텔레비전'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도쿄지방재판소(법원)는 명예훼손이 성립된다고 인정하고 550만엔(약 5천771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1일 내렸다고 교도통신 등이 이날 보도했다.
재판부는 금전적 배상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서 DHC텔레비전이 홈페이지에 사죄문을 게시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DHC텔레비전이 제작한 프로그램은 오키나와(沖繩)현 주일 미군 헬기 이착륙 시설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을 '테러리스트' 혹은 '범죄 행위를 반복하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신 공동대표가 배후에 있는 것처럼 묘사했는데 이에 대해 법원이 명예훼손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신 공동대표는 "획기적인 판결이다. 이 프로그램은 나를 이용해 오키나와 평화 운동은 우롱하는 악질적인 가짜뉴스였다"고 판결 후 소감을 밝혔다고 지지(時事)통신이 전했다.
DHC텔레비전은 지난해 재일 한국·조선인 차별을 조장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비판을 받은 요시다 요시아키(吉田嘉明) DHC 회장이 대표이사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DHC텔레비전은 일본 화장품 기업 DHC의 자회사다.
재판부는 DHC텔레비전이 제작해 2017년 1월 도쿄(東京)메트로폴리탄텔레비전(도쿄MX)이 방영한 버라이어티쇼 '뉴스여자(女子)'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신 공동대표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당시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기지 반대 운동과 관련해 폭력이나 범죄가 횡행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한 후 신씨가 공동대표인 단체가 이런 행동을 부추기고 경제적 지원도 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이어갔다.
한 출연자가 신 공동대표를 염두에 두고 왜 한국이 오키나와 기지 반대 운동을 하느냐는 취지로 질문을 했더니 "친북파이니까"라고 다른 출연자가 답하는 장면도 있었다.
소송을 심리한 오시마 히로시(大嶋洋志) 재판장은 신 공동대표가 도로 연좌 농성 등 "비폭력 저항 운동을 요구했다"면서 "폭력이나 실력 행사의 차원이 달라 시청자가 받는 인상이 전혀 달랐다"고 프로그램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프로그램으로 인해 신 공동대표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됐으며 방송 내용을 뒷받침할 취재도 없었기 때문에 명예훼손의 면책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신 공동대표는 뉴스여자의 사회자인 저널리스트 하세가와 유키히로(長谷川幸洋)에 대해서도 배상을 청구했으나 재판부는 그가 기획·제작·편집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기각했다.
이번 판결에 원고와 피고 모두 승복하지 않아 상급 법원의 판단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신 공동대표는 1심이 고액의 배상금을 인정해 사람을 모멸하는 행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으나 웹사이트에서 프로그램을 삭제해달라는 청구가 기각된 점을 고려해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야마다 아키라(山田晃) DHC텔레비전 사장은 이날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본사와도 대화하겠지만 아마도 항소하게 될 것이다. 싸우는 자세로 나가고 싶기 때문에 아직 그런 것(사죄광고)은 내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인터넷 매체 버드피즈저팬이 전했다.
앞서 신 공동대표의 신청에 따라 뉴스여자에 관해 심의한 일본 방송윤리·프로그램향상기구(BPO)의 방송인권위원회는 명예를 훼손하는 등 인권 침해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2018년 3월 판정하고 도쿄MX에 재발 방지를 권고한 바 있다.
노리코에네트는 혐한(嫌韓) 시위를 비롯해 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표현인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근절을 위해 2013년 9월 일본 시민들이 결성한 단체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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