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텍사스법 시행 허용…다른 주에서 유사한 법 도입할 수도
'낙태금지 우호' 보수 대법관 절대우위 구조…낙태허용 판례 변경 가능성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미국에서 50년 가까이 낙태를 허용한 연방대법원의 판례가 뒤집힐 가능성이 제기된다.
가뜩이나 낙태 금지에 우호적인 보수 성향 대법관이 대거 포진한 상황에서 낙태를 사실상 금지한 텍사스의 주법 시행을 막아달라고 제기된 소송을 대법원이 기각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지난 1일(현지시간) 텍사스의 일명 '심장박동법' 시행을 금지해 달라며 낙태권 옹호 단체들이 낸 가처분신청을 대법관 5 대 4로 기각하며 법 시행의 걸림돌을 제거했다.
이 법은 통상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한 것으로, 이 시점에는 임신 사실 자체를 자각하지 못할 수 있어 낙태를 막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결정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여성의 낙태권을 계속 허용할지에 둘러싸고 대법원의 본안 심리가 예정된 상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은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있는 시기인 임신 23~24주 이전에는 낙태가 가능하다. 이는 법이 아니라 1973년 1월 '로 대(對) 웨이드'로 불리는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확립된 여성의 권리다.
당시 소송에서 맞붙은 당사자(로)와 검사(웨이드)의 이름을 딴 이 판례는 그간 낙태 금지를 주장하는 보수와 낙태를 옹호하는 진보 진영 간 숱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런 가운데 대법원이 텍사스의 낙태금지법 시행을 용인하자 당장 48년 넘게 유지된 판례가 뒤집힐 것을 예고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더욱이 대법관 9명의 분포는 보수 6명, 진보 3명 등 보수 절대 우위여서 진보 진영의 우려가 더욱 커졌다.
블룸버그통신은 대법원의 이번 결정이 낙태권의 운명에 대한 불길한 신호라고 말했고, 로이터통신도 보수 진영이 오랫동안 요구한 판례 뒤집기에 대해 법원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법원은 임신 15주 이후로는 거의 모든 낙태를 금지한 미시시피주의 법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에서 심리를 진행키로 한 상태다.
향후 서면 공방, 공개 변론 등을 거쳐 내년 6월까지 판결이 나온다는 게 로이터통신의 보도다.
반면 이번 텍사스 주법에 대한 결정만 놓고 대법원의 최종 결론을 속단하긴 이르다는 해석도 나온다.
대법원의 이번 심리 결과는 원고들이 이 법의 시행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볼 것임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법원 역시 결정문에서 "텍사스 주법의 합헌성에 관한 어떤 결론에 근거한 결정이 아니다"라고 적시했다.
다만 보수 5명, 진보 4명이던 대법관 이념 분포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면서 보수 6명, 진보 3명의 보수 우위로 확실히 쏠린 상황에서 나온 결정인 만큼 낙태권 옹호론자들의 우려는 커 보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보수 성향 대법관 3명을 지명했는데, 그간 낙태권 인정 판례의 변경을 공공연히 언급했다.
대법원이 이번 결정을 통해 굳이 큰 논란을 수반하는 판례 변경이라는 경로를 택하지 않고도 낙태를 금지할 길을 열었다는 견해도 있다.
과거 불법 낙태 단속 권한은 정부 당국에 있었고, 따라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가능했다.
그런데 텍사스 주법은 주 정부가 낙태 단속에서 손을 떼는 대신 일반인이 문제를 제기하도록 규정하는 바람에 낙태 옹호론자들이 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주 정부는 불법 낙태 시술병원 등을 상대로 직접 소송을 거는 시민에게 최소 1만 달러를 지급기로 했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 취지대로라면 낙태 금지를 추진해온 다른 보수 성향 주들이 텍사스를 모방한 법을 만들 경우 시행까지 가능해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CNN방송은 대법원이 낙태 판결을 내릴 시점에는 일부 주들이 낙태를 효과적으로 금지하는 등 이미 지형이 바뀌어 있을 수 있다며 이 경우 보수 대법관들이 굳이 기존 낙태권 판례를 뒤집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jbr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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