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은 디지털 금융 도약 준비하는데 지폐에 공들이는 일본
미즈호은행, 시스템 장애 반복으로 신뢰 훼손…재발방지 '공염불'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지폐라고 자부하고 있다."
한국 언론이 '망언 제조기'라는 별명을 붙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의 이런 발언을 듣고 이 시대에 어울리는 화폐는 무엇인지 스스로 묻게 됐다.
각국에서 디지털 금융이 도약하고 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대면 경제 활동이 중요해진 시대다.
기존 지폐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결제 수단을 떠올리는 독자들도 꽤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소가 거론한 것은 일본이 2024년부터 새로 발행할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榮一·1840∼1931)의 초상이 담긴 새로운 1만엔 권 지폐다.
아소는 지난 1일 열린 인쇄 개시 기념식에서 신권의 디자인을 이렇게 칭찬한 것이다.
그가 "최첨단 위조 방지 기술을 구사해 누구나 쓰기 쉬운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공영방송 NHK를 통해 전국에 전파됐다.
의례적인 축사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81세의 13선 국회의원이 2012년 12월부터 9년 가까이 금융 정책 컨트롤 타워로 군림하는 사회에서 금융 혁신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일본 언론은 새로 적용된 위조 방지 기술을 비롯한 신권의 특장점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많은 홍보 기사보다 거기 붙은 한 누리꾼의 일갈이 더 눈길을 끌었다.
그는 "코로나 재앙에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 무인 계산대가 늘어나고…(중략) 새 1만 엔권을 인식할 기계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기업이 앞으로 기계를 교체하는 등 힘들 것"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일본은 전통적인 결제 수단을 유지하고 개발하는 데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기본이 안 돼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사건이 올해 이어졌다.
우선 지난 2월 28일 이른바 3대 '메가 뱅크' 중 하나인 미즈호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먹통이 됐다.
전국에 설치된 5천 대가 넘는 ATM 중 한때 4천여 대가 작동하지 않았다.
ATM이 현금카드나 통장을 삼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용자가 5천 명이 넘었다. 인터넷 뱅킹도 일부 거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은행 측은 종이 통장을 원칙적으로 발행하지 않는 디지털 계좌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작업 과정에서 시스템 부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한도를 초과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방식의 금융 체제를 급하게 신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셈이다.
미즈호는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이후 이들이 금융소비자의 재산을 관리할 기본적인 능력이 있는지 의구심을 부를 정도의 사태가 반복됐다.
3월 3일에는 데이터 센터 사이를 연결하는 기기의 문제로 통신 장애가 생겨 도쿄(東京)와 오사카(大阪)에서 일부 ATM이 또 중단됐다.
같은 달 7일에는 카드론 프로그램 갱신 작업 중 문제가 생겨 일부 이용자가 ATM이나 인터넷 뱅킹으로 정기 예금 계좌에 입금할 수 없는 문제가 벌어졌다.
12일에는 기기 장애로 외화 송금이 약 260건 지연됐다.
13일간 4번에 걸쳐 시스템에 문제가 반복된 것이다.
금융 담당 특명 장관을 겸임하는 아소는 일련의 사건이 반복되자 "매우 유감"이라며 "재발 방지가 중요하다. 집중적으로 후속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응했다.
이후 미즈호는 시스템 개발 부문의 인력을 증원하는 구상 등 재발 방지책과 제삼자 위원회의 진상 조사 결과를 공표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지난달 20일 시스템 장애로 미즈호은행과 미즈호신탁은행의 전국 점포 창구에서 입출금 거래나 송금이 중단되는 일이 다시 벌어졌다.
미즈호 측은 전날 밤 시스템 문제를 파악했으나 이런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있다가 영업 개시에 맞춰 복구를 완료할 수 없게 되자 개점 30분 점인 이날 오전 8시 반에 이를 홈페이지에 공지했다.
결국 인터넷 뱅킹이나 스마트폰 뱅킹에 익숙하지 않아 송금이나 입출금을 위해 점포를 방문한 고령자 등이 헛걸음만 했다.
이날 후지와라 고지(藤原弘治) 미즈호 은행장과 사카이 다쓰후미(坂井辰史) 미즈호파이낸션그룹 사장이 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으나 사흘 뒤에는 또 ATM 장애가 발생했다.
이쯤 되면 일본 금융 소비자는 '재발 방지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미즈호 측의 설명을 믿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금융과 핀테크 시대에 입출금 업무도 잘 못 하는 것이 일본 주요 은행의 현실인 셈이다.
참고로 미즈호은행은 일본 3대 메가뱅크 중 하나인 미즈호파이낸셜그룹의 주력 은행이다.
일본에서는 인수·합병(M&A)을 통해 덩치를 키운 총자산 1조달러 이상의 거대 금융기관을 메가뱅크라고 부른다.
미즈호 외에 미쓰이스미토모(三井住友)파이낸셜그룹, 미쓰비시(三菱)UFJ파이낸셜그룹도 여기에 속한다.
이 가운데 미즈호파이낸셜그룹의 올해 6월 말 기준 총자산은 약 226조8천891억엔, 미국 화폐로 환산하면 약 2조642억달러를 기록했다. 한국 돈으로 치면 2천388조원 수준이다.
일본에서 2013년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민영 방송 TBS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半?直樹)에는 "메가뱅크는 이 나라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결코 망하면 안 된다"는 대사가 등장한다.
주인공 한자와 역을 맡은 사카이 마사토(堺雅人)가 오와다 아키라(大和田曉) 상무(가가와 데루유키[香川照之] 분)의 발언을 인용한 것인데 뱅커의 자부심과 거대 금융기관의 오만한 자기 인식이 뒤섞여 느껴진다.
현실 속의 메가 뱅크는 ATM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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