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9·11 테러 20주년 맞은 뉴욕…"그날을 잊을 수 없다"

입력 2021-09-12 03:58  

[르포] 9·11 테러 20주년 맞은 뉴욕…"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라운드제로 추모행사 주변 인산인해…제복 차림 소방관과 시민들 몰려
유족들, 울먹이며 이름 낭독…"끔찍한 기억 되살아나고 슬픔 참을 수 없어"


(뉴욕=연합뉴스) 강건택 특파원 = 마치 20년 전 그날처럼 뉴욕의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맑고 푸르렀다.
바쁜 일과를 시작하던 화요일 아침이 아니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눈에 띄게 한산한 주말 아침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토요일인 11일(현지시간) 오전 뉴욕시 세계무역센터(WTC)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인적이 뜸한 맨해튼 대부분의 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일명 '그라운드 제로'로 불리는 옛 WTC '쌍둥이 빌딩' 붕괴 현장 주위를 수백 명의 인파가 둘러싼 장면이다.
주변 두세 블록을 철제 펜스로 막아놓고 경찰이 지키고 선 탓에 공식 추모행사가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20주기를 함께하려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꺾지는 못했다.
검은색 옷 또는 정장을 차려입은 유족들이 빨간 장미나 튤립 등 꽃을 손에 쥐고 줄줄이 행사장 입구로 향했고,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가 동료를 잃은 전직 소방관들도 오랜만에 제복을 꺼내입고 단체로 아픈 기억 속의 현장을 다시 찾았다.

10대 아들을 데리고 펜스 너머를 가만히 응시하던 전직 소방관 폴 모리스는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20년이 지났지만, 늘 그렇듯이 그날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모리스는 "우리는 수백명의 형제자매(소방관)를 잃었다"면서 "아들에게 그날의 일을 가르쳐주려고 함께 나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도왔고 친절함을 잊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WTC 붕괴 현장에 투입되지 않았던 다른 전·현직 소방관들 역시 제복 또는 소속 소방서 티셔츠를 입고 나와 연대의 뜻을 표현했다.
20년 전 WTC 북쪽 타워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날아와 부딪힌 시각인 오전 8시 46분이 가까워지자 곳곳에서 "이제 3분 남았어"라며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정보다 몇 초 빠른 8시 45분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몇몇 시민과 자원봉사자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대부분의 시민은 함께 묵념하지는 않았지만, 옛 WTC 터에 새롭게 우뚝 솟아오른 원월드 빌딩과 오큘러스 역사 쪽을 가만히 응시하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슬픔이 북받친 듯 팔짱을 꼭 낀 채 서 있던 한 노부부는 "결코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날"이라면서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던 일은 헌혈밖에 없었다. 적십자사에 인파가 몰려 헌혈을 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었다"라고 전했다.
세계 각국의 취재진도 몰려와 주변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고 방송 리포트를 제작했다. 취재 신청이 몰린 탓에 연합뉴스를 비롯한 외국 언론사 상당수는 행사장 내부 취재 허가증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TV와 온라인으로 생중계된 공식 추모행사는 여느 때처럼 유족들이 차례로 나와 그날의 희생자 이름들을 낭독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사전 녹음된 음성을 틀었던 것과 달리 2년 만에 라이브로 마이크를 잡은 유가족 중 일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추모식의 시작을 알린 유족 대표 마이크 로는 "우리가 먼저 떠나보낸 가족들의 이름을 낭송할 때 마치 악령이 우리 세상에 내려온 것처럼 느껴졌던 그 끔찍한 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며 "참을 수 없는 슬픔"이라고 말했다.
당시 북쪽 타워에 부딪힌 항공기 승무원이었던 딸을 잃은 그는 "그날은 수많은 사람이 평범함을 뛰어넘는 행동을 보여준 때이기도 하다"며 시민들의 용기에 감사를 표했다.

미국의 '국민 로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꿈속에서 널 만날 것'이라는 노래로 뉴요커들의 슬픔을 달랬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뉴욕은 9·11 테러를 이겨낸 경험을 토대로 다시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다.
9·11 추모박물관의 클리퍼드 채닌 수석부사장은 최근 뉴욕외신기자협회 브리핑에서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사건의 한복판에 있다"면서 "그러나 9·11이 우리에게 뭔가를 가져다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다시 일어서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20주년을 앞두고 미군 철수 직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한 사건이 일부 미국인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듯했다.
한 노년 남성은 '바이든, 아프가니스탄, 망신'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조용히 인파 속을 누볐다.

firstcircl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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