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만 더 의존할 수 없다" 판단에 역내 합종연횡
'압력밥솥 신세 벗자' 사우디-이란 관계개선 가능성도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그간 미국의 비호를 받던 걸프지역 국가들이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계기로 그런 안보지형의 급변을 직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걸프국 고위관리는 13일(현지시간) 로이터, 가디언 등 일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아프간 사태는 충격적이고 충격적인 지진"이라며 "여기에 진동이 아주, 아주 길게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리는 미군의 아프간 철수가 40년 넘게 유지돼온 '카터 독트린'이 완전히 깨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카터 독트린은 석유에 의존해야 하는 미국이 걸프 지역에서 자국 이익을 지키려고 군사개입을 불사하겠다는 선언을 말한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1980년 1월 23일 연두교서에서 "페르시아만을 장악하기 위한 어떠한 외부 세력의 시도도 미국의 핵심적 이익을 겨냥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며 그런 공격은 군사력을 포함해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격퇴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등 석유 부국들은 이에 따라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안보를 보장받아왔다.
걸프국 관리는 미국과 걸프 지역의 이 같은 관계가 수명을 다해가고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는 "우리가 진짜로 미국의 안보 우산에 20년간 더 의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이는 지금 당장 매우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 관리는 미국의 석유 의존도 감축을 반영하려고 이미 다수 걸프국이 진행해온 외교정책 재조정이 아프간 사태로 급물살을 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에 따라 동맹관계가 재조정되고 사우디와 이란 같은 역내 전통적 라이벌들이 관계를 더 실용적으로 바꿀 욕구를 갖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걸프국들이 안보 의존을 다변화하기 시작한 가운데 사우디가 최근 러시아와 방위협약을 체결한 것도 그 가시적 사례로 제시됐다.
이란은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이끈 지난 정부 때 이미 정보협력 차원에서 사우디와 대화를 시작했으며 그 빈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바레인도 이스라엘과 관계정상화를 위한 아브라함 협약을 체결하는 등 역내에 새 동맹국을 물색하고 UAE는 시리아와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걸프국 관리는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된) 이 지역이 압력밥솥 같은 처지에서 좀 벗어나 보고자 하는 노력"이라며 이런 행보의 의미를 설명했다.
다른 한편에서 이 관리는 미국의 아프간 철군 때문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고무된다는 점도 지각변동의 일부로 거론했다.
이 관리는 당장 아프간에서 극단주의 무장정파 탈레반이 20년 전 정권을 잡았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폭정을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그자들은 본질적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지금은 세계가 돌아가는 이치를 더 잘 이해하게 됐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리는 미국이 이슬람을 악용한 테러세력을 겨냥해 아프간에서 벌인 20년 전쟁이 아무 유산도 없이 끝났다며 중동,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에서까지 극단주의들이 이에 영감을 받아 득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미국의 영향력이 최소화된 가운데 파키스탄의 승리이자 중국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정세분석도 이어졌다.
이 관리는 "아프간을 둘러싼 지정학적 투쟁이 있다면 한편에서 파키스탄과 중국, 다른 한편에서 인도, 이란, 러시아가 다투는 걸 보게 될 것"이라며 "미국은 거기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jangj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