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조직적 조사 진행 방해…인권단체·유족 반발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200명이 넘는 사망자와 6천여 명의 부상자를 낸 지난해 8월 레바논 베이루트 대폭발 참사의 진상조사가 또다시 중단됐다.
증인 출석을 요구받은 전직 장관이 오히려 조사를 주도한 판사의 교체를 요구한 데 따른 것인데, 지난 2월에 이어 두 번째인 증인 측의 판사 기피 신청에 유족들과 인권단체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28일(현지시간) 레바논 언론과 외신에 따르면 베이루트 폭발 참사 진상조사를 주도해온 타렉 비타르 판사가 전날 업무를 중단했다.
비타르 판사의 업무 중단은 폭발 참사의 증인으로 출석을 요구받은 전직 내무장관 노하드 마츠눅의 재판부 기피 신청 때문으로 전해졌다.
마츠눅 전 장관은 판사가 기초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혐의를 씌워 위헌 소지가 있으며, 이번 사건에 선입견을 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비타르 판사는 27일 예정됐던 전직 군 정보 사령관 등에 대한 심문 등 업무를 중단하고 고등법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조사의 핵심은 베이루트 항구에 쌓여있다가 폭발한 질산암모늄이 어떤 경로로 유입돼 6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레바논 검찰은 폭발 참사와 관련해 하산 디아브 당시 임시 총리, 알리 하산 칼릴 전 재무장관을 포함한 장관 2명, 관세청 고위 관리 2명을 지난해 12월 기소했다.
그러나 인화성 물질인 질산암모늄 방치의 책임이 있는 전직 관리들 조사는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진상 조사를 주도한 판사가 증인 요구로 조사를 중단한 것도 벌써 두 번째다.
비타르 판사에 앞서 조사를 주도했던 파디 사완 판사도 증인 출석 요구를 받은 전직 장관의 기피 신청으로 지난 2월 조사를 중단했고 결국 교체됐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치 지도자들과 의원들은 판사가 사건을 정치화한다거나 의원들의 면책 특권을 외면한다는 트집을 잡으며 조사를 방해해왔다.
인권단체 리걸 어젠다의 변호사인 기다 프랑기에는 AP 통신에 "기소 위기의 의원들이 면책 특권을 노리고 다음 달 회기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것"이라며 "정치권이 법의 심판을 피하고자 얼마나 애쓰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사 피해자 유족들도 이런 정치인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15살 아들을 잃은 미레이 바제르지 쿠리는 "비타르 판사는 레바논 사법부의 최고 희망이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조사를 망치려고 무슨 일이든 한다"며 "판사를 상대로 한 소송과 문제 제기가 반복되는 것은 그들이 폭발에 연루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항구에서는 지난해 8월 4일 큰 폭발이 일어나 214명이 숨지고 6천여 명이 부상했다. 당국은 항구에 6년 동안 보관해왔던 질산암모늄 약 2천750t이 폭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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