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절벽 장기화 땐 고금리 금융·사채로 몰릴 우려"
(서울=연합뉴스) 김종현 기자 = 정부가 가계부채 연착륙을 위해 금융권의 가계대출을 전방위로 옥죄면서 자금 조달이 막힌 실수요자의 비명이 커지고 있다.
은행권에서 꼭 필요한 중도금 대출이나 전세대출, 신용대출이 막힌 고신용자들이 제2금융권으로 이동하면서 저소득층이나 취약계층이 제도 금융에서 밀려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금융위원회는 가계부채 총량 관리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가계부채 증가세가 멈추고 자산시장 버블이 가라앉을 때까지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억제는 계속될 전망이다.
◇ 버블 꺼질 때까지 전방위 대출 규제
가계대출과의 전쟁에 나선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최근 금융업계 관계자나 전문가들을 광범위하게 만나면서 연일 강한 발언으로 가계대출 포위망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있다.
고 위원장은 28일 정책금융기관장과의 간담회에서 금융안정과 관련 "누적된 가계부채와 자산 가격 거품 등 금융 불균형을 사전에 엄격하게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7일 경제·금융시장전문가 간담회에서는 "각종 잠재 위험요인의 뇌관을 선제적이고, 안전하고, 확실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다"면서 "특히 취약계층에 대한 확고한 지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현재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잠재 리스크인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강도높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엄격한 가계대출 총량 관리로 가계부채 증가를 억제하고 부동산 등 자산시장의 거품까지 걷어내겠다는 것이다.
고 위원장은 이를 위해 "총량 관리의 시계(視界)를 내년 이후까지 확장하고, 대책의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강도 높은 조치를 지속적·단계적으로 시행해나가겠다"고 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전문가들은 정부의 가계대출 억제 대책에 공감했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센터장은 "가계 부실과 자산 가격 리스크가 경제의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지 않도록 선제적 대처가 시급하다"면서 부채의 총량·속도 조절, 차주(대출자)의 상환능력 범위 내 대출 관행 정착, 금융권별 규제 차이 해소를 통한 풍선효과 차단 등을 주문했다.
이종우 경제평론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자영업자 대출 비율 등을 고려할 때 가계부채의 양과 질이 모두 악화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자산 가격 상승이 멈추고 대출 부실이 현실화할 경우 금융 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장기간 사회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하지만 가계부채 관리의 불가피성은 인정하더라도 실수요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대출 총량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출 총량을 기계적으로 규제하면 실수요자들 입장에서는 위험한 돈이라도 쓸 수밖에 없는 쪽으로 몰리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면서 "금리를 좀 더 부담하더라도 대출을 쓸 수 있게 해야지 아예 막아버리는 것은 타격이 너무 크다"고 했다.
송준 LG경제연구원 박사는 "가계대출 수준이나 증가율이 다른 나라보다 심각한 상황이어서 이를 통제할 요인은 충분하다"면서도 "지나치게 총량 규제에 의존하다 실패하면 정책의 신뢰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실수요자가 어려움에 부닥치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어 상황에 맞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커지는 대출 난민 비명
금융당국과 금융권이 강력한 대출 억제에 나서면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윤명 소비자시민모임 사무총장은 "금융권에서 실수요가 생겨 큰돈을 대출받는 분들은 중도금 대출이든 전세대출이든 장기간에 걸친 계획하에 하는 건데 어느 날 갑자기 대출을 막거나 한도를 줄여버리면 계약 취소나 위약금 문제 등에 직면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지난 15일 이후 대출 규제와 관련한 5건의 청원이 올랐는데 대부분이 아파트 집단대출(중도금 대출) 관련 민원이었다.
40대 후반에 자녀를 2명 둔 가장이라는 한 청원인은 지난 27일 "아파트 사전청약 11년 만에 입주하는데 집단대출을 막아놓으면 실수요자는 죽어야 하나요?"라는 제목의 청원을 올렸다.
그는 2010년 12월 LH에서 추진하는 하남의 한 아파트에 사전청약을 넣어 당첨됐다면서 "당시 청약 공고에는 이 지역이 비규제지역이어서 은행 담보대출에 제한이 없어 80%까지 가능했는데 그동안 투기과열지구로 지정된데다 입주를 앞둔 지금은 대출한도가 축소돼 대출이 막혔다"고 주장했다.
'작년 2월 수도권에서 청약이 당첨돼 생애 처음으로 집 계약을 하게 됐다'는 청원인은 "분양 당시 시세의 60%에 맞는 집단대출이 있다고 해 입주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이번에 집단대출을 막는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서 집단대출 규제를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앞서 또 다른 청원인은 지난 24일 "최근 은행별 주택담보대출 규제로 인해 당장 입주가 코앞으로 다가온 1주택 실거주자들이 집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고 했다.
그는 "1금융권(은행)이 막히면 서민들은 정작 높은 이자를 안고 2금융권이나 사채를 쓸 수밖에 없다"면서 1거주 실소유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해제해 달라고 읍소했다.
청약으로 생애 첫 집을 장만하게 됐다는 한 청원인은 지난 17일 '생애 최초 주택구입 꿈 물거품, 집단대출에 막혀 웁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에서 "현재 신규 분양아파트 입주 한 달을 앞두고 집단대출을 막는 바람에 은행으로부터 4% 고금리 대출을 선착순으로 받는 상황"이라면서 "입주를 앞둔 서민·실수요자들에게는 집단대출을 막지 말아 달라"고 했다.
◇ 저신용자 대출절벽 가중될 듯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인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최근 상호금융중앙회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농·수·신협·산림조합 등 상호금융의 가계대출 신규 취급액(37조7천165억원) 가운데 신용등급 1∼2등급인 고신용자 대출은 46.5%를 차지했다.
상호금융의 고신용자 신규대출 비중은 2018년 19.7%, 2019년 21.4%에서 작년엔 26.8%로 커지다 올해는 절반 가까이 확대됐다.
반면 신용등급 7등급 이하 저신용자 신규대출 비중은 2018년 18.6%, 2019년 16.7%, 2020년 13.8%에서 올해 상반기에는 10.5%까지 축소됐다.
주택이나 주식, 코인 등 자산에 투자하느라 은행권 대출 한도를 꽉 채운 고신용자들이 대출 규제가 느슨한 2금융권 대출을 잠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상호금융사들이 한정된 대출 재원을 떼일 염려가 적은 고신용자들에게 집중하면서 기존 저신용자들에게 돌아갈 대출 몫이 줄어든 셈이다.
2금융권에서 밀린 저신용자들로서는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있다.
이는 금융당국과 은행권이 대출 총량 관리를 위해 가계대출을 전방위로 옥죌 경우 대출 수요가 2금융권으로 쏠리면서 이곳을 주로 이용하던 저신용자들이 대출 난민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태윤 교수는 "실수요자 입장에서 은행 대출이 막히면 2금융권이나 아예 사금융으로 몰릴 수도 있는 만큼 대출을 막아서는 안 된다"면서 "저신용자들은 정책자금을 통한 재정 지원 형태로 가야 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윤명 사무총장도 "자금이 꼭 필요한 분들에게 은행 접근이 어려워지면 고금리의 대부업체나 사채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kim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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