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성향 '세습 정치인'…한일관계 중시·대화 많아질 가능성
징용·위안부 등 갈등 현안엔 기존 일본 정부 입장 이어갈 듯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29일 자민당 총재로 당선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는 2015년 당시 일본 외무상으로 한국과 위안부 합의를 주도한 인물이다.
'비둘기파'로 평가되는 자민당 내 명문 파벌인 '고치카이'(宏池會, 일명 기시다파)의 회장인 기시다는 한일 관계를 중시해왔다.
기시다는 다음 달 4일 소집되는 임시국회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에 이어 100대 일본 총리로 선출된다.
그는 일제 징용 노동자와 일본군 위안부 등 한일 갈등 현안에서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체로 유지할 것으로 보이지만, 스가 정권 때보다는 한일 대화와 물밑 접촉의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 자민당 총재 도전 2번 만에 당선된 세습 정치인
1957년 도쿄도(東京都) 시부야(澁谷)구에서 태어난 기시다는 대학 입시에서 두 번 실패를 맛본 뒤 1978년 일본의 사립 명문 와세다(早稻田)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1982년 대학 졸업 후 일본장기신용은행에 입사해 약 5년 동안 근무한 뒤 1987년 아버지인 기시다 후미타케(岸田文武) 중의원의 비서로 전직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92년 부친이 사망하고 이듬해인 1993년 여름 히로시마(廣島) 제1구에 자민당 후보로 출마해 처음으로 중의원에 당선됐다.
9선 의원인 기시다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경쟁한 고노 다로(河野太郞), 노다 세이코(野田聖子)와 마찬가지로 세습 정치인이다.
1999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1937∼2000) 내각에서 건설성(현 국토교통성) 정무차관,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에서 문부과학성 부대신으로 기용됐다.
이후 1차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때인 2007년 내각부특명대신(오키나와·북방·국민생활·과학기술·규제개혁 담당상)으로 임명돼 처음 입각했다.
◇ 아베 설득하며 한일 위안부 합의 성사시켜
2012년 12월 2차 아베 정권 출범과 함께 외무상에 발탁돼 약 4년 8개월 재직했다.
기시다는 태평양전쟁 후 일본 외무상 연속 재임 일수 1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외무상 재임 중이던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의 일본 측 당사자가 된다.
아베 당시 총리는 자신의 지지 기반인 보수층의 반발을 우려해 위안부 합의에 신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시다는 이런 아베를 설득해가면서 위안부 합의를 성사시켰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위안부 합의 발표 나흘 전인 12월 24일 아베는 총리관저에서 기시다 등과 만났을 때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이라고 기술된 위안부 합의안에 난색을 보였다.
이에 기시다가 "여기서 정리해야 한다. 지금 합의하지 못하면 내년 한일관계는 표류한다"며 설득했고, 아베는 "알았다. 기시다 씨가 말한 대로다"며 '고'(GO) 사인을 냈다고 한다.
◇ '리버럴' 명문 파벌 고치카이의 5번째 총리
기시다는 뼛속부터 우파인 아베와는 이념적 성향이 다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수장으로 있는 자민당 내 주요 파벌인 고치카이는 자민당 내 '리버럴'(자유주의)로 평가되며,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왔다.
고치카이에서 총리가 배출된 것은 설립자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1899∼1965) 전 총리 이후 이번이 5번째다.
기시다는 2차 아베 정권 시절 외무상과 방위상,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됐지만, 작년 9월 자민당 총재에서 스가 총리에 이어 2위에 머물러 고배를 마셨다.
이번에 자민당 총재 선거 후보 4명 중 가장 먼저 지난달 26일 출마를 선언했고, 두 번째 도전 만에 집권당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기시다가 일본 총리로 취임하면 아베·스가 정권 때보다는 한일 접촉과 대회 기회가 많아지고 2019년 12월 이후 중단된 정상회담도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싹트고 있다.
일본 정치에 정통한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학 법학부 교수는 "기시다의 지금까지 정치적 성향을 보면 비둘기파이고 과격한 발언은 거의 하지 않는 신중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고치카이의 전통과 외무상으로 오래 재직한 기시다의 성향 등을 고려할 때 대화 자체에도 인색했던 스가 총리와는 다를 것으로 전망했다.
◇ "과격한 발언 거의 하지 않는 신중한 사람"
그러나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 나온 기시다의 발언을 보면 한일 갈등 현안을 풀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시다도 위안부 문제 등에서 한국 측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8일 일본기자클럽 주최 자민당 총재 후보 토론회에서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한국이) 이런 것조차 지키지 않으면 미래를 향해 무엇을 약속하더라도 미래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며 양국 간 대화가 필요하지만 그런 점에서 "볼(공)은 한국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시다는 지난 13일 일본외국특파원협회(FCCJ)에서 연 기자회견에서도 일본이 태평양전쟁 중의 주변국 가해행위와 관련해 사과를 계속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런 발언 때문에 역사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 현안에서 아베·스가 정권과는 다른 전향적인 태도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강한 반발을 초래할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경쟁자인 고노는 지난 24일 자민당 총재 선거 온라인 정책 토론회에서 "총리 재임 중 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기시다는 "시기와 상황을 고려한 후 참배를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거 기간 자민당 내 보수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모호하게 발언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기시다는 찬반이 명확히 갈리는 사안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을 때가 있어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와 관련, 이헌모 교수는 "기시다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같은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일 현안을 다루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한일 물밑 접촉을 비롯한 대화는 과거에 비해 활발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hoj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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