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R&D, 삶의질 향상 집중해야…철학 없다면 '추격자'에 머무를 것"
"'정치가 과학 흔든다'? '제목 바꿔 달기'일 뿐 큰 흐름 못 바꿔"
(서울=연합뉴스) 오수진 기자 = "정부가 개별 기술 전쟁에 일일이 대응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정부가 할 수 없는 역할은 과감하게 버리고 공공 연구개발(R&D)을 통해 국민의 삶을 어떻게 향상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지난 4일 연합뉴스 인터뷰에 응한 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과기자문회의) 부의장은 정부 부처 R&D 프로젝트가 '신성장 동력 찾기'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경향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미 정부가 그런 역할을 할 능력이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역할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공공 R&D가 급속하게 팽창했지만 제대로 된 결과물이 없었다"고 지적하면서 국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이자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자제어저차원전자계연구단 단장인 염 부의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주목받는 물리학자 중 한 명이다.
세계 최초로 4진법 연산이 가능한 전자소자를 개발하고 국제 우수 학술지에 수백 편의 논문을 내는 등 열정적으로 연구 활동을 해 온 그는 2017년부터 현재까지 문재인 정부의 1∼4기 과기자문회의 부의장 역할을 수행 중이다.
부의장을 연속 4번 맡는 것은 과기자문회의 30년 역사상 그가 처음이다.
과기자문회의는 국가 중장기 과기정책 방향과 주요 정책을 대통령에 자문하고 심의하는 기구다. 의장은 대통령이 맡으므로, 실질적 수장은 부의장이다.
광화문 과기자문회의 지원단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염 부의장은 과기계 대표적인 '미스터 쓴소리'답게 과기 정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현 정부를 포함해 역대 대한민국 정부가 보여준 '과학과 기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아쉬운 점을 숨기지 않았다.
먼저 염 부의장은 우리나라의 공공 R&D의 목표가 오랫동안 잘못 설정됐다고 비판했다.
정부 주도로 국민을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하는 시대가 이미 지났음에도 산업화 시대 논리에 사로잡혀 기술 상용화, 기술 수출 등의 '저차원적인 목표'에 집착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염 부의장은 "산업에 쓰이는 기술을 정부가 개발하는 시대가 아니다. 산업 기술 개발은 독려하지 않아도 기업들이 너무나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염 부의장은 정부 R&D는 산업계 R&D와는 다른 목적이 있어야 한다며 "(그 목적은) 국민의 입장에서 R&D가 국민 행복을 보장하고 사회 위기 상황에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모든 정부가 대통령, 국무총리 직속의 다양한 위원회를 만들어 개별 이슈에 대응하려고 했으나 연구자를 모아 연구비를 나눠주고 끝내버릴 분 아무도 결과에 책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염 부의장는 "이번 정부도 4차산업혁명, 탄소중립, 미세먼지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사실상 과기자문회의의 역할과 모두 겹친다"며 "4차산업혁명위원회와 과기자문회의 차이가 무엇인가. 국민이 이를 구분할 수 있는가. 소위 '위원회 정치'는 중구난방의 R&D만 양산할 가능성이 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눈여겨봐야 할 공공 R&D 분야로 감염병, 기후변화, 고령화를 꼽았다.
해당 이슈들은 계층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공동체 전반에 영향을 끼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 큰 수익이 난다는 보장이 없어 공적 자금 투입 없이는 관련 기술 개발이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
염 부의장은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일본을 롤모델 중 하나로 제시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4차 산업혁명' 키워드는 일본에서는 '소사이어티 5.0'으로 명명된다. 소사이어티 5.0은 정보화 사회 이후 시작되는 '초연결 사회'에 국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핵심 과제로 설정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일본의 로보틱스 기술도 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해 출발했다"며 "일본은 어떻게 로봇을 많이 팔고 수출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로봇 산업에) 국민의 세금을 투입해 국민이 어려움을 겪는 부분을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부연했다.
염 부의장은 자신의 임기 후반부 과기자문회의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감염병, 기후변화 위기에 집중하고자 한 이유도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며 이 부분을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고 싶다고 부연했다.
중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R&D 정책이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생명력을 잃는다는 일부 의견에 대해 그는 "새 정부 출범 때마다 진행되는 과기정책 '제목 바꿔 달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염 부의장은 "일부 논자들이 '과기 정책이 너무 자주 변해 연구자들이 자기 분야에 집중할 수 없고, 이 때문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연구자가 그렇게 말하면 핑계일 뿐이고 외부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들이 '정치에 흔들리는 과학'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국내 정치가 글로벌 산업의 흐름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과학기술도 사회의 큰 흐름과 연동되어 있어 특정 정권, 정치인이 이를 바꾸거나 뒤집기는 어렵다"고 단언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긴 호흡으로 과기정책의 철학을 제시하고 공공 R&D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과기자문회의의 역할이 앞으로 더 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염 부의장은 "공공 R&D에 대한 제대로 된 목표와 철학이 없다면 우리나라는 선도자가 될 수 없고, 글로벌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이슈 카드 중 마지못해 우리가 따라가야 할 카드를 집는 '추격자'로 계속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kik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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