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건설 등 강경책은 저급"…난민 망명권 등 제기
2015년 난민 사태 재연 우려…EU 회원국 내분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송병승 기자 = 유럽연합(EU)이 벨라루스의 '난민 밀어내기 공격'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는 가운데 인권 문제와 현실적 국경통제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EU의 동부전선 격인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은 불법적 경로를 통한 외국인의 유입에 장벽 설치, 무력 대응과 같은 즉각적이면서도 손쉬운 강경책으로 국경을 일단 차단하고 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유럽행을 감행한 중동발 주민들의 궁박한 사정을 마냥 외면한다면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이를 외교적 압박 수단으로도 사용하는 EU의 이중 잣대라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EU, 벨라루스 '난민 밀어내기'에 장벽 건설 논의
최근 몇 개월간 벨라루스를 통해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인근 EU 국가로 입국을 시도하는 중동 지역 출신자는 계속 증가했다.
특히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3만 명 이상이 벨라루스에서 폴란드로 '서진'해 국경을 불법으로 넘으려 시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EU는 벨라루스가 러시아를 포함해 10여 개국에서 항공기를 통해 고향을 떠난 중동발 체류자를 수도 민스크로 실어나르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들을 EU로 몰아내 EU에 부담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게 EU 측의 주장이다. EU가 벨라루스에 가한 제재에 보복하려고 자국에 있는 중동인의 이동을 방조하거나 조장했다는 것이다.
벨라루스가 중동 지역에서 데려온 이주민과 난민을 EU 회원국인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국경으로 밀어내면서 이들 3국은 군을 동원해 진입을 막고 철조망과 장벽 설치에 나서는 등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
동시에 EU에 대해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라고 요구하고 아울러 장벽 설치 비용 등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EU는 벨라루스에 대한 추가 제재 방안을 논의하고 있으며 이르면 다음 주초에 벨라루스의 고위 인사와 단체, 그리고 벨라루스 국영 항공사에 대한 제재를 결정할 예정이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10일(현지시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와 만나 "EU 국경 보호를 위한 물리적 기반 시설을 EU 재원으로 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당초 EU는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한 장벽 건설은 비효율적이라면서 자금 지원을 거부했지만 상황이 더 악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폴란드 등에 대한 자금 지원을 논의하고 있다.
또한 EU 집행위원회는 EU 국경 지역에 감시 카메라 등 국경통제 장비 설치를 지원할 예정이다.
◇중동발 주민, EU 국경 앞 생존 위기…"EU는 더 잘해야 한다"
이 같은 강경책에 대해 EU 안팎에선 인권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벨라루스가 중동지역 이주민과 난민을 '불순한' 동기로 밀어내 EU의 난민 정책을 시험한다고 해도 EU 국경에 내몰린 사람들의 비인도적이고 곤궁한 처지를 외면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폴란드 국경에 도착한 중동 출신자 수천 명은 임시 숙소에서 폴란드 국경 경비 병력과 대치하고 있다. 벨라루스 측 국경수비대는 이들이 식수와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임신부나 젖먹이들이 0도 가까운 차가운 땅 위에서 잠을 자야 하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UNHCR) 대표는 10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EU 지도자들은 이주민 문제에 '저급한 해결책 경쟁'에 나서지 말라고 호소하면서 "법치에 기반을 둔 EU는 더 잘해야 하고, 더 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에서 무책임한 외국인 혐오, 장벽과 철조망 설치, 무차별적 구타, 폭력적 송환 같은 '반사적 반응'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사람들을 강물이나 바다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 둔 채 망명권 수용 의무를 회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5년 전 EU 난민 사태로 내분 위기 재현될 수도
2015∼2016년에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EU 지역으로 난민이 대거 유입되는 사태로 EU가 회원국간 내분 위기를 겪었던 상황이 재연될 우려도 제기된다.
2015년 내전과 폭력을 피해 중동·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130만명 이상이 들어왔고 2016년에도 계속되면서 EU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난민 위기에 처했다.
일부 EU 회원국은 국경통제를 시행하고 난민 중 불법 이주민을 가려내 송환하는 등 난민 유입을 저지하는 정책을 폈다.
EU 집행위원회는 난민 수십만명을 EU 회원국이 골고루 분산 수용하는 방안을 제의하고 이를 거부하는 국가엔 부담금을 부과했다. 당시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권은 난민 강제 할당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국경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이렇게 일부 국가가 국경통제를 시행하면서 역내 자유 통행을 보장하는 솅겐 조약 체제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EU 중 지리적으로 난민 발생지와 최전선이었던 그리스와 이탈리아는 EU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고 경제적 여력이 있던 독일은 10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유럽의회 보수당 소속의 이사벨 비젤러-리마 의원은 이주민과 난민 문제는 EU 회원국을 분열시키는 주제가 될 수 있다면서 "우리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U, 벨라루스 '배후' 러시아와 셈법 복잡
이번 사태의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다는 것도 EU로서는 큰 부담이다.
특히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러시아에 가스 공급을 의존하는 EU의 대응책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해관계를 정확히 아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EU에 대해 가스 공급을 차단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
벨라루스는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공급하는 야말-유럽 가스관이 지나가는 경유국이다.
이번 국경 갈등에 대해 러시아는 벨라루스를 두둔하면서 서방에 책임을 돌렸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나토와 EU를 포함한 서방이 오랜 기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상대로 추진한 정책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서방은 이들 국가에 서방식 민주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난민은 벨라루스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고 유럽으로 가고 싶어한다"라며 "유럽은 스스로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벨라루스의 '난민 공격'에 대한 서방의 비난이 빗발치는 가운데 러시아는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2대의 전략폭격기를 벨라루스 영공에 보내 벨라루스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과시했다.
러시아는 EU와 미국 등 서방이 벨라루스에 친서방 정권을 세우려고 벨라루스의 사회적 혼란을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러시아는 옛 소련의 일원인 벨라루스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하며 노골적으로 루카셴코 정권을 비호해왔다.
songb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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