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신임했던 미국공사 알렌, 구한말 인식 담은 서한 남겨
알렌 "美, 日의 조선지배 용인 안타깝다…합병, 스스로 불러들인 결과"
(뉴욕=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최근 다시 한번 불거졌다.
지난 12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에 한국이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통해서 승인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한일합병에 대해 미국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2005년에도 국회 외교통상위 국정감사에서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김원웅 광복회장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부터 비롯된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미국 측의 역사적 책임 의식이 결여돼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
논란이 국회 바깥으로 번지자 현재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인 김기정 연세대 교수는 언론 기고를 통해 김 의원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당시 김 교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성격이 협정이냐, 각서냐 하는 형식상 논란은 있지만, 미국은 밀약을 통해 적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물론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 미국 육군성 장관의 비공식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일 뿐 정식 외교 문서가 아니었고, 이 같은 대화 내용이 미일 양국이 거래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100년 전 미국과 일본 정치인이 비공개로 한 대화 속에서 복잡한 국제 외교의 선후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다만 구한말 한반도 문제에 직접 관여했던 인물들이 미국의 책임 문제에 대해 어떤 시각을 보였는지 살펴본다면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행스러운 것은 1884년 조선에 입국해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주한 미국 공사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인 호러스 알렌이 당시 상황을 담은 다양한 문서를 남겨놨다는 점이다.
1944년 위스콘신대가 출판한 '갓, 매먼 앤드 더 저패니스: 호러스 알렌 박사와 한미관계'에는 알렌 본인이 1903년 한성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소개돼 있다.
알렌은 편지에서 대한제국의 상황에 대해 "일본에 합병되는 것은 이미 결정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 "내 나라인 미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적 입장을 용인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이 편지가 작성된 1903년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2년 전이지만, 알렌은 이미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러일전쟁 이전부터 일본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알렌은 이 편지를 쓰기 직전 백악관을 방문해 '미국이 러시아 편에 서야 한다'는 주장을 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알렌은 이 편지에서 일본 편을 든 루스벨트 행정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한일합병의 원인에 대해선 다른 시각을 보였다.
그는 일본과 합병될 대한제국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불러들인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처럼 부패한데다가 어리석은 행동을 했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의 조선을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고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알렌까지 조선왕조의 무능을 비판한 것이다.
세계적인 문명 사학자 윌 듀런트는 "위대한 문명은 내부에서 스스로 붕괴하기 전까지는 외부의 힘으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한일합병의 원인에 대한 알렌의 시각과도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인다.
k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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