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묻힐 뻔한 사건, 세계 테니스계 스타·고위인사가 재점화
관영매체 영상 공개로 안전 확인했으나 의혹 눈초리 여전
中, 미국의 올림픽 외교 보이콧 검토 이어 추가 악재…대응 부심할 듯
(베이징=연합뉴스) 조준형 한종구 특파원 = 중국 지도급 인사에 대한 '미투'(Me Too·피해자에 의한 성폭력 피해 공개)로 출발한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35·彭帥) 사건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직전 중국 최고지도부(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일원이었던 장가오리(張高麗) 전 부총리와 강압에 의한 성관계를 했다는 펑솨이의 SNS 폭로로 시작된 사건은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들과 고위 관계자, 유엔 인권기구, 미국 정부까지 나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국제적 핫이슈가 됐다.
펑솨이는 미투 폭로 뒤 SNS(소셜미디어) 계정이 삭제되고 연락이 두절되면서 실종설이 돌기도 했으나, 중국 관영매체가 잇따라 그의 근황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공개하면서 일단 실종 의혹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자유롭게 지내는지 등은 확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폭력 의혹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울러 미국과 서방 일부 국가들이 내년 2월 베이징동계올림픽에 정부 관계자를 파견하지 않는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가운데, 향후 전개 과정에서 세계 스포츠계까지 중국에 등을 돌릴 경우 중국으로선 올림픽 성공 개최에 경고등이 켜질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 잠잠해지나 싶던 이슈, 테니스계 유력인사·스타들이 불 지펴
사건은 지난 2일 펑솨이가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 계정을 통해 장가오리 전 부총리에게 당한 자신의 성폭력 피해와 불륜 관계를 공개한 데 이어 그 내용이 외신 보도를 통해 전파되면서 공론화했다.
펑솨이의 웨이보 계정이 폐쇄되고 중국 매체의 관련 보도와 네티즌 목소리가 통제된 가운데 중국에서 중요 정치행사인 6중전회(공산당 19기 중앙위 6차 전체회의·8∼11일)와 제3차 '역사 결의' 채택(11일) 등 굵직한 뉴스들이 이어지면서 사건은 세간의 관심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국제 테니스계가 나서면서 사건은 재점화 수준을 넘어 폭발력 있는 국제 이슈로 커졌다.
스티브 사이먼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4일(현지시간) "펑솨이를 비롯한 모든 여성의 말은 검열이 아니라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며 사건에 대한 조사를 중국 측에 촉구하면서 동조 물결을 일으켰다.
그는 또 미국 CNN과 인터뷰에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중국과 관련된 사업을 모두 철수할 것"이라며 중국 당국을 압박했다.
여기에 더해 로저 페더러(스위스), 라파엘 나달(스페인),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 오사카 나오미(일본), 세리나 윌리엄스(미국) 등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들이 펑솨이의 안전을 우려하거나 피해에 대한 조사를 중국 측에 촉구하는 입장을 앞다퉈 밝혔다.
스타들의 목소리는 이 사안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증폭시켰고, 결국 유엔 인권사무소와 백악관까지 나서 펑솨이의 안전에 대한 우려를 표하면서 사안은 중국의 인권 문제, 비밀주의와 인터넷 및 언론 통제 등을 건드리는 중대 이슈로 비화했다.
◇ 실종 의혹 일단 해소…의구심은 여전
펑솨이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자 폭로 19일 만인 21일 공개 행사에 참석한 모습이 대중에 공개됐다.
관영매체 환구시보(環球時報)의 후시진(胡錫進) 편집인은 이날 오전 자신의 트위터에 "펑솨이가 이날 오전 베이징에서 열린 유소년 테니스 경기에 나타났다"며 관련 동영상을 올렸다.
37초 분량의 영상 속에서 펑솨이는 운동복 차림으로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
다만 영상 속에서 관중들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영상은 현장에 있던 환구시보 기자가 촬영한 것이라고 후 편집인은 전했다.
후 편집인은 전날 밤에도 트위터에 "펑솨이가 코치, 친구들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모습이 찍힌 영상 두 개를 확보했다"며 각각 14초와 1분짜리 영상을 올렸다.
관영 CGTN 기자도 지난 19일 펑솨이가 누군가의 방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반소매, 반바지 차림으로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위챗(微信·중국판 카카오톡)에 올렸다.
펑솨이의 안전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주장이 적지 않다.
영상과 사진 속 펑솨이는 밝게 웃는 모습이지만, 미투 폭로 뒤 어떻게 지냈는지와 중국 정부의 강압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없어 강제로 촬영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나온다.
특히 그가 직접 자신의 상황을 밝히지 않고 있는 점도 이러한 의혹을 짙게 하고 있다.
사이먼 WTA 투어 CEO는 펑솨이의 식사 영상이 공개된 뒤 "펑솨이로 보이는 영상이 관영방송 때문에 공개돼 기쁘다"면서도 "그녀를 보게 된 것은 긍정적이지만 강제 또는 외압 없이 그녀가 자유롭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고 밝혔다.
이어 "동영상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은폐되고 검열당한 그녀가 성폭행당했다는 혐의와 그녀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우려는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 미국 '외교 보이콧' 검토 이어 올림픽 앞둔 중국에 또 하나의 악재
이 사안을 중국 국내적으로 틀어막은 채 시간과의 싸움에 들어갔던 중국 정부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데 이어 영국도 그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 중국으로선 외교적 보이콧 도미노가 우려되는 참이었다.
미국에 대해 '올림픽의 정치화'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올림픽은 선수들의 축제임을 강조하는 식으로 사태의 악영향을 최소화하려던 중국 정부는 올림픽과 관련한 또 하나의 돌출 악재에 직면했다.
만약 펑솨이의 신변을 둘러싼 이상설이 장기화하고 중국 정부가 납득할 만한 설명과 조치에 나서지 않는다면 올림픽을 앞두고 스포츠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대 중국 여론이 차갑게 식을 수 있다.
그것은 미국의 외교 보이콧 이상으로 올림픽 성공에 악재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전망이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19일(현지시간) 브리핑에서 "중국 당국이 펑솨이의 행방과 안전에 검증 가능한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고 압박했고, 리즈 트로셀 유엔 인권위원회 대변인도 기자들에게 "펑솨이의 소재와 안전 여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성폭행과 관련한 완전히 투명한 조사를 촉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딕 파운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도 전날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이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며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중국 정부는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오리젠(趙立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이 나올 때마다 "그 사건을 들어보지 못했다"라거나 "해당 부서에 질문하기 바란다", "외교 문제가 아니다"라며 굳게 입을 닫았다.
결국 펑솨이가 직접 나서서 육성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인시키고, 장가오리에 의한 피해에 대해 추가로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사안은 계속 확대일로를 걸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jk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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